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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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대륙고려와 반도조선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12. 22. 00:05

윤여동설 - 대륙고려와 반도조선 - 최초주장

 

 

 

 

  왕건의 고려는 대륙의 하북성이 중심이었고, 이성계의 조선은 한반도가 중심이었다 
  윤여동설에 의한 환인환국, 환웅단국으로부터 고조선, 삼한, 삼국, 발해, 고려까지 우리 역사의 중심은 한반도가 아니라 발해 북쪽 중국 하북성 난하를 중심으로 한 그 부근이라는 것이다. 
  환인환국의 중심강역은 하북성과 내몽골 적봉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칠로도산(七老圖山) 부근이고, 환웅단국의 중심강역은 칠로도산 동쪽 노로아호산(努魯兒虎山) 부근이며, 고조선(왕검조선)의 도읍인 왕검성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으로서 이때 고조선의 최대강역은 서쪽으로는 황하 북부 오르도스 지역까지, 동쪽으로는 요하까지, 남쪽으로는 발해와 황하하류를 지나 산동반도까지, 북쪽으로는 내몽골, 몽골, 대흥안령, 바이칼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러다가 고조선 말기 춘추전국시대에 하북성 보정, 역현 부근에 근거를 둔 연나라(선비족)의 진개에게 나라 서쪽지역인 북경 부근까지를 빼앗긴 채, 진(秦)나라 시대를 지나게 되고, 또 그 북쪽지역인 하북성 장가구 일원에 부여(扶餘), 내몽골 정람기 일원에 예(濊)가 위치하고, 중국에서는 진(秦)나라가 멸망하고 한(漢)나라가 건국되자 고조선의 강역은 북쪽으로 내몽골과 대흥안령, 서쪽으로 장가구 양하, 서남쪽으로 태행산맥, 남쪽으로 발해와 황하하류 부근까지로 고착되기에 이르고, 또 한(漢)나라 때 고조선의 준왕이 위만에게 왕검성을 빼앗기게 되어 지금의 만리장성 북쪽은 위만조선이 되고, 그 남쪽 북경, 당산, 진황도, 호로도 부근에 다시 한(韓)을 세우게 되어 고조선의 땅은 북쪽의 위만조선과 남쪽의 한으로 다시 나누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 후 부여는 북부여, 졸본부여로 나뉘었다가 북부여가 졸본부여에게 병합당하게 되자 북부여의 일파인 해부루가 북쪽으로 도망쳐 다시 동부여를 건국하게 되고, 위만조선은 한 무제의 침공을 받고 멸망하여 한사군이 설치되며, 한은 다시 삼한으로 쪼개져 마한, 진한, 변한이 된다는 것이다.
  그 후 졸본부여에서 고구려가 건국되고, 마한의 동북쪽에서 백제가 건국되며, 진한에서 신라가 건국되고, 변한에서 가야가 건국됨으로써 우리가 말하는 소위 삼국시대가 되었다고 한다.

 

☆ 사실 삼국이 건국되었을 때 낙랑과 낙랑동부도위, 낙랑남부도위는 제외하더라도 동부여, 마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옥저, 예(동예)가 상당기간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이 시기는 열국시대라 부르는 것이 합당할 것이고, 후일 마한, 동부여, 가야, 옥저, 예(동예)가 소멸한 이후 시기만을 삼국시대라 불러야 옳을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가 멸망하고 발해가 건국되며, 백제가 멸망하고 신라가 그 땅을 차지한 시기를 남북국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타당하고, 다시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게 되자, 말갈이 고구려 땅을 차지하고 발해를 건국했다가 거란에게 멸망하게 되는데, 이때 그 남쪽 일부는 고려에 투항하게 되고, 얼마 후 신라 역시 고려에 투항함으로써 왕씨의 고려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려는 옛 삼한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신라와 고구려의 맥을 이은 발해의 남쪽지역을 차지함으로써 국호를 고구려의 맥을 이었다는 의미로 고려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고조선으로부터 고려에 이르는 역사의 현장이 지금의 중국 하북성 난하를 중심으로 한 그 부근 지역이고, 조선 역사의 현장은 한반도라는데 우리 역사 해석의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 
  고구려 미천왕(재위: 300-331)은 서진 말기의 혼란한 시기를 틈타 고구려가 요동서안평을 쳐서 빼앗고, 하북성 승덕시 흥륭현 일원에 위치했던 후한낙랑군과 북경 동쪽 준화부근에 위치했던 대방군을 축출하게 된다.

 

  1세기 초 왕망의 신나라가 멸망하고 광무제의 후한이 건국되자 신나라에 동조했던 투후 김일제의 후손들이 한반도로 도망쳐와서 다시 나라를 세웠고, 4세기 중반에는 또 백제 12대 계왕의 아들 무광왕이 대륙백제에서 근초고왕과의 왕위다툼에서 패하자 대륙을 떠나 한반도 서부로 와서 백제를 다시 세우고, 주변을 정복했으므로 한반도는 이때 급격한 변화를 겪어 고인돌문명, 옹관묘 문명 등이 사라지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미천왕의 아들인 고국원왕 때 연나라 모용황의 침공을 받아 환도성이 함락되자 평양 동쪽 황성으로 도읍을 옮겼던 것이고, 또 백제에서 근초고왕과 무광왕(계왕의 아들) 사이에 왕위다툼이 일어났다가 무광왕이 패하자 한반도로 도망쳐 익산 금마 부근의 지모밀 땅에 반도백제가 건국되는 계기가 되어  그렇게 한반도에도 백제의 흔적들이 남겨지게 되었고, 고려 때에도 한반도는 고려의 영향권 내에 있어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된 후 한반도로 도읍을 옮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대륙지명을 그대로 한반도에 교치 시킨 후 그 지명의 대륙역사를 한반도에 새로 교치 시킨 지명에 그대로 붙여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삼국 역사의 흔적들에 대륙에서 일어난 삼국의 역사를 덮어씌워 해석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이고, 한반도 고려의 흔적들에 대륙고려의 역사를 덧씌워버렸다고 한다.
  그리하여 경주의 옛 무덤들을 신라왕릉이라 하게 되었고, 개성부근의 옛 무덤들을 고려왕릉이라 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신라의 왕들은 한반도에 묻힌 적이 없고, 고려의 왕들 역시 한반도에 묻힌 적이 없으니 경주의 옛 무덤 속에서 신라 어느 왕의 왕릉이라는 명문이 발견되지 않는 것이고, 개성의 옛 무덤 속에서 고려 무슨 왕이라는 지석하나도 발견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이다.
  고려사절요 현종 8년(A.D.1017) 12월 조를 보면,
  "교서를 내려, '고구려, 신라, 백제왕의 능묘는 모두 소재지의 주와 현으로 하여금 수리하게 하고, 땔감을 베는 행위를 금하고 지나는 사람은 말에서 내리도록 하라'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고려 초에도 삼국왕릉들을 잘 관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므로 이들 삼국의 왕릉들은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도 잘 관리되고 있었을 것이고, 조선시대에도 잘 관리되었어야 마땅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조선시대에 이르면 삼국시대 왕릉들은 말할 것도 없고, 고려시대 왕릉들까지 한꺼번에 몽땅 잃어버리는 것이 이상하다는 것이다. 
  이는 역사의 현장이 대륙에서 한반도로 갑자기 바뀌어졌기 때문에 사실 한반도에 그 왕들의 능이 있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조선이 역사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한반도 경주에 신라 왕릉이 필요했고, 개성에 고려 왕릉이 필요했으므로 옛 무덤을 억지로 신라왕릉, 고려왕릉이라 하고 엉성하게 표지석을 세워야 했던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조선초기의 왕이나 대신들은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인데, 조선이 한반도 역사의 정통 맥을 이었다고 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역사를 왜곡했을 가능성이 많고, 조선후기 사람들은 역사가 의도적으로 왜곡된 내막을 알지 못하고, 한반도가 고조선으로부터 우리 역사의 중심지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다.

   

    지금 한반도의 고려왕릉이라는 곳에 당시 세워진 신도비가 없는 것은 그 왕들이 한반도에 묻히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며,  지금 서울 근교 동구릉에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능이 있고 신도비도 있고, 서울 근교에는 조선시대 왕릉들이 즐비하고, 신도비도 세워져 있어 그 능의 주인이 누구인지, 업적이 어땠는지도 자세히 알 수 있는 것은 조선시대부터 왕들이 한반도에 묻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이 한반도에서 500년 왕조를 이었다는 것은 확실할 것이고 지금 우리는 한반도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고려로부터 그 이전의 역사는 발해 북쪽 대륙이 중심이었고, 조선의 역사는 한반도가 중심이었다는 말로 정리가 가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