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마한이 고구려" 라고 말한 것은 최치원의 실수 - 최초주장
최치원은
"마한은 고구려이고, 진한(辰韓)은 신라(新羅)다" 라고 말했다.
(본기에 의하면 신라는 먼저 갑자년에 일어났고, 고구려는 그 뒤 갑신년에 일어났다고 했다.
여기에 말한 것은 조선왕 준을 가리킨 것이다.
이것으로 본다면 동명왕이 일어날 때에 마한까지 차지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를 마한이라고 한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혹 금마산(金馬山)이 있다고 해서 마한을 백제(百濟)라고 하지만 이것은 대개 잘못된 말이다.
고구려 땅에는 본래 읍산(邑山)이 있었기 때문에 이름을 마한(馬韓)이라 한 것이다)
"마한이 고구려" 라고 한 최치원의 말은 잘못이다.
고쳐 말하면 부여(졸본부여, 북부여)는 고구려이고, 마한은 백제이고, 진한은 신라이며, 변한은 가야라고 말했어야 했다.
왜냐하면 마한은 한(韓)의 중심 역할을 하던 곳으로서 54개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진한은 12개 소국, 변한 역시 12개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고구려의 건국과 마한은 아무 관계가 없었다.
마한은 북경 동쪽 당산(풍윤)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고, 고구려의 건국지는 만리장성 북쪽에 위치한 졸본(하북성 적성현 후성진)으로서 그 땅은 바로 옛 해모수의 북부여 땅이었다가 졸본부여의 건국시조 동명왕에게 빼앗겼는데, 북부여 해모수의 고손자였던 주몽이 동부여에서 도망쳐 졸본으로 와서 아들이 없던 졸본부여 왕의 둘째 딸과 혼인을 했고, 졸본부여왕이 죽자 그 왕위를 물려받아 졸본부여의 왕위에 올랐다가 기원전 37년에 이르러 국호를 고구려로 바꿈으로써 역사에 그 이름을 등장시켰고, 후일에 이르러 동부여도 고구려에 복속되었기 때문이다.
이 삼국유사 마한 조의 기록은 횡설수설하고 있어 도대체 일연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조차 알기 어렵다.
그리고 일연이 인용한 "본기"라는 기록을 삼국사기 본기로 보기 쉬우나 "본기"라는 별도의 책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승휴도 제왕운기 하권 동국군왕 개국연대의 주에 "본기"의 기록을 인용하여 환웅설화를 싣고 있는데, 삼국사기의 각 본기에는 환웅설화가 실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보면 고려 때에는 우리 역사를 기록한 "본기(혹시 구삼국사의 본기를 말하는지도 모르겠다)"라는 역사서가 전해지고 있었을 것이다.
사이(四夷)·구이(九夷)·구한(九韓)·예맥(穢貊)이 있는데, 주례(周禮)에 직방씨(職方氏)가 사이(四夷)와 구맥(九貊)을 관장(管掌)했다고 한 것은 동이(東夷)의 종족이니 곧 구이(九夷)를 말한 것이다.
삼국사(三國史)에는,
"명주(溟州)는 옛날의 예국(穢國)이었다. 야인(野人)이 밭을 갈다가 예왕(穢王)의 도장을 얻어서 바쳤다.
또 춘주(春州)는 옛날의 우수주(牛首州)인데 곧 옛날의 맥국(麥麴)이다.
또 혹은 지금의 삭주(朔州)가 바로 맥국(貊國)이라고도 하고 혹은 평양성(平壤城)이 맥국이라고도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회남자(淮南子)의 주(注)에는,
"동이의 종류는 아홉 종류" 라고 했고,
논어정의(論語正義)에는 "구이(九夷)란, 1. 현토(玄토), 2. 낙랑(樂浪), 3. 고려(高麗), 4. 만식(萬飾), 5. 부유(鳧臾), 6. 소가(素家), 7. 동도(東屠), 8. 왜인(倭人), 9. 천비(天鄙)"라고 했고,
해동안홍기(海東安弘紀)에서는,
"구한(九韓)이란, 1. 일본(日本), 2. 중화(中華), 3. 오월(吳越), 4. 탁라(탁羅), 5. 응유(鷹遊), 6. 말갈(靺鞨), 7. 단국(丹國), 8. 여진(如眞), 9. 예맥(穢貊)"이라고 했다.
☆ 해동안홍기라는 것은 안홍이라는 사람이 쓴 동도성립기라는 글을 말하는 것이다.(삼국유사 탑상 황룡사 9층탑 편 참조)
동이의 종족은 시대와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르게 분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정해진 일정한 기준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사는 지역을 중심으로 그때 그때의 변화된 상황에 따라 분류했던 듯 하다.
서경에는 우이(우夷), 회이(淮夷), 도이(島夷), 내이(萊夷)가 나타나고, 후한서에는 견이(견夷), 우이(于夷), 방이(方夷), 황이(黃夷), 백이(白夷), 적이(赤夷), 현이(玄夷), 풍이(風夷), 양이(陽夷)의 구이로 분류하고 있다.
그런데 후대 서기 660년에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하여 멸망시킬 때 신라 태종 무열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우夷道行軍摠管)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보이는 것을 보면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부근에 위치했던 신라를 귀퉁이에 위치하고 있는 동이라는 의미로서 우이(隅夷)라고 분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므로, 회이란 회 지역에 살던 동이족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고, 내이란 산동반도 내주 부근에 살던 동이족을 말하고, 도이란 발해 가운데 섬에 사는 동이족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혹시 요동반도에 살던 고대의 왜를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후한서에서 황이 백이, 적이, 현이 등으로 분류한 것은 동이지역 중에서 그들이 살고 있는 위치에 따라 중앙(황이), 서쪽(백이), 남쪽(적이), 북쪽(현이), 동쪽(양이), 사이지역(방이) 등으로 나눈 듯 하다.
그러다가 신라가 가야, 백제를 통합하고, 고구려를 멸망시킨 이후 신라가 천하의 중심이라는 개념이 도입되자 구한이라는 개념도 도입되었을 것인데 광의의 의미로서의 구한이란 온 세상의 모든 국가와 종족을 통칭하는 말이라 생각되고, 협의의 의미로서는 동이 9족을 말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신라의 선덕여왕은, 만일 대궐 남쪽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나라가 침범하는 재앙을 막을 수 있고, 구한이 와서 조공을 바칠 것이라는 자장의 말에 따라 황룡사 9층 탑을 세웠다고 하는데, 그 구한에 대하여 일연은 안홍의 동도성립기라는 기록을 인용하여 위와 같이 분류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요동반도 부근에 살고 있었으며 신라를 괴롭힌 고대의 왜국을 말하는 것이고, 중화는 중국, 오월은 중국 남쪽에 위치했던 오나라와 월나라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탁라는 백제의 남쪽에 위치했던 탐라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응유는 매를 길들여 사냥하는 내몽골의 동부여를 말하는 듯 하다.
말갈은 대흥안령에 살던 옛 숙신족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되고, 거란은 옛 북부여의 후예로서 몽골을 말할 것이고, 여진은 대흥안령 동쪽의 동여진을 말하는 것이고, 예맥은 신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던 내몽골 고륜기 부근의 동예와 능원 부근의 맥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때 신라는 한반도의 경주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일원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황룡사 9층탑은 한반도 경주에 세웠던 것이 아니라 중국 요녕성 금주시(錦州市)를 중심으로 신라를 빙 둘러싸고 있는 나라들을 복속시키겠다는 염원을 담아 세운 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중국 사서들에는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한결같이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