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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백제와 낙랑 그 의문의 접촉기록들 - 최초주장

윤여동 2009. 2. 13. 00:41

윤여동설 - 백제와 낙랑 그 의문의 접촉기록들 - 최초주장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건국된 나라이다.
  그런데 백제(百濟)와 낙랑(樂浪)은 백제가 건국된 시점부터 국경을 직접 접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재위 4년(B.C.15) 조를 보면, "가을 8월 낙랑에 사신을 보내 우호관계를 맺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재위 8년(B.C.11)조에는, 온조왕이 낙랑과의 접경지역에 마수성을 쌓고 병산에 목책을 세우자 낙랑태수가 사람을 보내 낙랑을 침공하려 하는 것이냐고 항의하면서 의심하지 않게 하려면 성과 목책을 헐어버릴 것을 요구하게 된다.
  그런데 온조왕이 그 요구를 거부하자 그 일로 인하여 백제와 낙랑사이에 화친이 깨어지게 되었고, 그렇게 화친이 깨어진 재위 11년(B.C.8) 여름4월에 이르자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 책을 습격하여 파괴하고 1백여 명을 죽이고 납치하여 가는 것으로 보아 낙랑과 말갈, 백제는 서로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자 백제는 7월에 독산과 구천 두 곳에 책을 설치하여 낙랑군으로부터 오는 길목을 아예 차단해버리는 조치를 취하게 되어 백제와 낙랑군 사이는 더욱 악화되기에 이른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재위 13년(B.C.6) 2월에 이르러 왕의 어머니인 태후 소서노가 죽고 민심이 동요하자 온조왕은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나라의 동쪽에는 [신라가 있고, 서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서 변경을 침공하기 때문에 편안한 날이 적다"고 하면서 한수의 남쪽으로 도읍을 옮길 생각을 하게 되고, 다음해 정월에 한수의 남쪽(남한성)으로 도읍을 옮게 되는데, 이때 백제는 마한과의 협상을 거쳐 강역을 "북쪽(서쪽)으로는 패하(패수)까지, 남쪽(동쪽)으로는 웅천까지, 서쪽(남쪽)으로는 대해, 동쪽(북쪽)으로는 주양까지"로 획정하게 된다.


 

☆ 우리는 지금 백제의 건국지 위례성을 서울부근이라 하며, 이 기록 속의 패하(패수)를 대동강이라 하고, 웅천을 금강이라 하며, 대해는 서해바다, 주양을 원주라고 하고 있는데, 엉터리 중의 엉터리 해석이다.
  왜냐하면 백제는 북경 동쪽인 지금의 중국 하북성 난하 부근에서 건국되었고, 전한 낙랑군의 치소는 당산의 북쪽인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었으며, 이와는 별도로 또 칠로도산 산맥의 동쪽에 낙랑동부도위가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백제가 도읍을 위례성(하남위례성)에서 남한성으로 옮기고 난 후인 재위17년(B.C.2) 봄에 낙랑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불태우자 온조왕은 그를 보복하기 위하여 재위 18년(B.C.1)에 낙랑의 우두산성을 습격하려고 구곡까지 갔으나 큰 눈을 만나 돌아오고 마는데, 이후 백제와 낙랑의 접촉기록은 한 동안 사라지게 된다.

 

☆ 낙랑군은 전한 → 왕망의 신나라 → 후한으로 이어지는 혼란기를 틈타 최리가 그 땅을 차지하고 낙랑국을 세우고 칭왕을 하였다가 서기 37년에 이르러 고구려 대무신왕에게 멸망당하게 되고, 서기 44년에 후한의 광무제가 고구려를 침공하여 살수이남 땅을 다시 빼앗아 그곳에 다시 낙랑군(후한낙랑군)을 설치하게 되는데,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흥륭현 일원이다.


 

  그러다가 8대 고이왕 재위13년(A.D.246) 조에, "가을 8월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낙랑태수 유무와 삭방태수 왕준과 함께 고구려를 치므로 왕이 좌장 진충을 시켜 빈틈을 노려 낙랑 변방 주민들을 습격하여 잡아왔더니 (낙랑태수) 유무가 이 말을 듣고 분개하였다. 왕이 그들로부터 침공을 받을까 염려하여 낙랑 사람들을 돌려보냈다"라고 하면서 백제와 낙랑의 접촉기록이 다시 나타나게 되는데, 삼국지 예전을 보면, 예가 고구려에 복속되자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이 고구려를 정벌했고, 이때 예의 불내후가 고을을 들어 투항했다 라는 기록이 있으니 삼국사기의 삭방태수 왕준과 삼국지의 대방태수 궁준은 동일인일 것이다. 왜냐하면 낙랑군과 대방군은 경계를 바로 접하고 있던 이웃 군으로서 고구려의 바로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나라의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하려 했다면 바로 이 낙랑군, 대방군과 공조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국사기가 대방(帶方)을 삭방(朔方)으로 잘못 기록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이를 보면 후한 광무제가 서기 44년에 살수이남 땅에 다시 세웠던 후한낙랑군이 후한이 멸망한 후 그대로 위나라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는데, 한동안 잠잠하다가 10대 분서왕 7년인 서기 304년 봄 2월에 이르러 백제가 낙랑의 서쪽(?)현을 습격하여 빼앗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고, 겨울 10월에는 분서왕이 낙랑에서 보낸 자객에게 시해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로부터 9년 후인 313년에 이 후한낙랑군은 고구려 미천왕에 의해 축출되고 그 땅은 고구려에 흡수되어 우리 역사에서 낙랑과의 접촉기록이 사라지게 된다.
  그런데 한참 후대의 기록인 양직공도 백제국사에 "백제는 옛날에 왔던 마한의 지속이다. 진나라 말기에 구려가 요동낙랑을 차지하였고 (백제는) 요서진평현을 차지했다(百濟舊來夷馬韓之屬 晉末駒麗略有遼東樂浪 亦 有遼西晉平縣)"라고 하면서 다시 백제와 낙랑이 언급된다.
  여기서 말하는 진(晉)나라는 동진을 말하는 것으로서 동진은 316년부터 420년까지 존속하다가 유유의 송나라에게 멸망당해, 송, 남제, 양, 진(陳), 수, 당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양직공도의 기록대로라면 이 동진 말기에 백제가 고구려를 쳐 요서 진평현을 빼앗았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동진 말기라면 이 시기는 백제 13대 근초고왕으로부터 18대 전지왕 때까지의 시기인데, 삼국사기를 보면, 백제의 근초고왕은 서기 371년 겨울에 이르러 군사 3만을 몰아 고구려의 평양성을 침공하여 고국원왕을 죽이고 승리한 후 도읍을 한산(북한산의 오기?)으로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진서 함안 2년(A.D.372) 조에, 동진에서 백제에 사신을 보내 "百濟王餘句爲鎭東將軍領樂浪太守(백제왕 여구를 진동장군 영낙랑태수로 삼았다)"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근초고왕의 이름이 부여구였고, 이때 백제가 후한낙랑군 땅의 일부는 백제가 차지하지 않았나 싶기도 한데, 호태왕 비문 영락 6년(A.D.396) 조를 보면, 고구려가 백제로부터 58개 성, 700개 촌을 빼앗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땅을 다시 광개토왕에게 빼앗겼을 것이다.     
  따라서 백제는 낙랑 땅 일부를 371년 겨울부터 396년까지 약 25년 동안 가지고 있다가 그 땅을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다시 빼앗겼는데, 동성왕, 무령왕 때 이르러 다시 그 땅을 놓고 고구려와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을 펼쳤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드디어 북경 부근에서 건국된 대륙백제를 찾아낸 것이고, 백제가 북위와 전쟁을 하여 대승을 거두었다는 기록들을 무리 없이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 속의 백제는 한반도에 위치했던 것이 아니라 지금의 북경(필자주 : 고대의 요동이다)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북위와 전쟁을 했던 것이고, 그리하여 북위도 수십만 기병을동원하여 백제를 침공했다가 대패했던 것이다.
  북위가 수십만의 기병을 이끌고 서해바다를 건너 한반도의 백제를 침공했던 것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신라는 대륙백제의 동쪽에, 고구려는 그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삼국사기는 한반도 삼국의 기록이 아니라 북경 동쪽 난하를 중심으로 대륙에 위치하고 있던 삼국의 기록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우리 삼국 역사를 얼마나 엉터리로 해석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고, 우리가 지금 얼마나 넓은 땅을 잃어버렸는지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반도사관, 식민사관에 물들어 모든 옛 기록을 한반도로 끌어들여 해석하려고 안달하는 어리석은 무리들이 수두룩하니 대한민국의 미래가 심히 걱정스러운 것이다.
  

  반도사관으로 어떻게 중국의 동북공정, 탐원공정을 격파할 수 있을 것이며,  잃어버린 대륙의 우리 옛 땅을 되찾을 수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