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신라와 낙랑 그 의문의 접촉기록들 - 최초주장
낙랑은 신라 시조 혁거세거서간 30년(B.C.28)부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기록을 보면, "낙랑 사람들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침입했는데, 변방 백성들이 밤에 대문을 잠그지 않고 노적가리가 들에 있는 것을 보고 서로가 말하기를 '이 지방의 백성들이 서로 도둑질하지 않으니 가히 도덕이 있는 나라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몰래 군사로서 습격한다는 것은 도둑이나 다름없다. 부끄럽지 않은가? 하고는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라는 이상한 기록인데, 삼국유사 낙랑국 조에는 "국사(國史)에는 이런 말이 있다. '혁거세 30년에 낙랑 사람들이 신라에 항복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동일한 시기에 대한 신라와 낙랑과의 관계를 전혀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혁거세 30년에 낙랑 사람들이 신라에 항복했다"라는 조문이 들어 있지 않으므로 삼국유사에서 말하는 '국사(國史)'는 삼국사기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국사(國史)"라는 것이 혹시 진흥왕 6년(A.D.545)에 거칠부가 지었다는 바로 그 신라의 역사서는 아니었을까?
그리고 남해왕 원년(A.D.4) 조에는, "가을 7월 낙랑병사가 와서 금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했다."라는 기록이 나타나고, 11년(A.D.14) 조에는, "왜인이 병선 1백 척을 보내 해변의 민가를 약탈하므로 6부의 병사로서 이를 방어했는데, 낙랑이 우리의 내부 방어가 허술할 것이라 하여 금성을 심히 급하게 공격해 왔다. 밤에 유성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니 적병들이 두려워 퇴각하다가 알천가에 머물면서 돌무더기 20개를 쌓아 놓고 갔다. 6부 군사 1천명이 이를 추격하여 토함산 동쪽으로부터 알천에 이르러 돌무더기를 보고 적병이 많은 것을 알고 추격을 중지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기록대로라면 낙랑과 신라는 원래부터 국경을 접했고, 금성이 낙랑으로부터 매우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어 낙랑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금성을 신속하게 침공할 수 있었다는 말로 해석이 가능해진다.
☆ 지금 우리의 상식대로 한반도의 평양이나 춘천 부근에 낙랑이 위치하고 있었고, 경북 경주가 신라의 도읍 금성 있었다면 낙랑이 그렇게 쉽게 경주까지 침공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3대 유리이사금 13년(A.D.36)조에는 "가을 8월에 낙랑이 북쪽변경을 침범하여 타산성을 함락시켰다" 라는 기록이 나타나고, 14년(A.D.37) 조에는 "고구려왕 무휼(대무신왕)이 낙랑을 쳐서 멸망시키니 그 나라 사람 5천명이 투항하여 와서 6부에 나누어 살도록 했다" 라는 기록이 나타나는데, 이때 고구려 대무신왕에게 멸망한 낙랑은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설화로 유명한 최리의 낙랑국이었다.
이때 최리는 전한, 왕망의 신나라, 후한으로 이어지는 혼란기를 틈타 낙랑 땅을 차지하고 스스로 낙랑국을 세워 왕위에 올랐다가 고구려 대무신왕의 침공을 받고 멸망했던 것이다.
삼국유사 낙랑국 조에는 이때의 상황을 "3대 노례왕 4년(14년의 오기)에 고구려 제3대 무휼왕이 낙랑을 멸망시키니 그 나라 사람들이 대방과 함께 신라에 투항해 왔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최리의 낙랑국이 멸망하자 낙랑국의 일부 사람들과 대방 사람들의 일부가 함께 신라로 투항해 왔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데, 신라 5대 파사왕은 서기 87년에 이르러 "(신라가) 서쪽으로는 백제와 이웃하고, 남쪽으로는 가야와 접했다"라고 말하고 있으니 이때의 신라와 백제는 동쪽의 신라와 서쪽의 백제 그리고 신라 남쪽에 가야가 위치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후 낙랑에 관한 기록은 한동안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사라졌다가 15대 기림이사금 3년(A.D.300)조에 "낙랑과 대방 두 나라가 귀순하여 왔다(樂浪帶方兩國歸服)"라고 하면서 다시 나타나게 되는데, 낙랑과 대방을 "나라(國)"라고 표기하고 있어 매우 의아하다.
☆ 이때는 시기적으로 중국 서진(西晉) 말기의 혼란한 시기였고, 서진이 멸망한 후에는 혼란스런 5호16국시대가 되는데, 그렇다면 이때 낙랑군태수와 대방군태수가 그 혼란기를 틈타 스스로 독립하여 "낙랑국"과 "대방국"을 세우고 칭왕을 했다가 쫓겨나 신라로 망명했던 것일까? 그랬다가 그 혼란한 시기를 틈타 313년에 낙랑이, 314년에 대방이 고구려 미천왕에 의해 우리 땅에서 완전히 축출당했던 것일까?
그런데 수서나 북사 등 중국 사서들을 보면, 한결같이 "신라는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신라의 진흥왕에게 "사지절 동이교위 낙랑군공 신라왕"이라는 작위를 주었다는 기록을 시작으로 그 이후 신라의 왕들에게도 한결같이 "낙랑군공 신라왕" 또는 "낙랑국왕 신라왕"이라는 작위를 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신라가 낙랑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말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데, 후한 광무제에 의해 살수이남 땅에 설치되었던 후한낙랑군이 지금의 중국 북경 동북쪽 밀운수고 일원에 위치했던 것을 감안하여 생각해보면, 신라는 한반도가 아닌 지금의 중국 하북성 요녕성 호로도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이 신라와 낙랑, 그리고 대방을 한반도로 끌어들여 역사를 해석함으로써 우리 스스로 우리의 역사 강역을 한반도로 축소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대륙의 북경 부근까지의 드넓은 우리의 옛 땅이 중국의 손아귀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있는 것이다.
필자 같이 어리석은 사람도 우리 역사를 밝혀낼 수 있고, 대륙의 우리 옛 땅을 찾아낼 수 있는데, 평생 역사를 연구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역사학자라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정말 모르는 것일까? 모른 체 하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