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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왜국 천황의 시호에 들어가 있는 "신(神)" 자의 비밀 - 최초주장

윤여동 2009. 3. 1. 21:45

윤여동설 - 왜국 천황의 시호에 들어가 있는 "신(神)" 자의 비밀 - 최초주장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했으니 마음에 썩 내키지는 않지만 왜국 천황과 그 역사에 대하여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일본서기를 보면, 고대 왜국의 천황 중에 그 시호에 "신(神)"자가 들어간 사람은 세 사람이다.
  초대 신무(神武), 10대 숭신(崇神), 15대 응신(應神)인데, 일본 사람들은 신무를 왜국의 건국시조로 받들고 있다.
  그렇다면 신무는 왜국의 건국시조라는 의미와 그가 혼란스런 나라를 무력으로 평정하고 나라를 세웠다는 의미로 신(神)자를 넣어 시호를 정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고구려의 대무신왕(大武神王)과 같이 마치 귀신처럼 군사들을 움직여 전투에서 승전했던 듯하다. 
  어떤 사람은 신무를 신화 속의 인물로 치부하기도 하나 우리 삼국건국시기와 비슷한 시기에 나라를 세웠을 인물을 신화 속의 인물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 일본서기에는 신무가 나라를 세운 때를 기원전 660년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600년을 늘리기 한 것으로서 사실은 기원전 60년경에 왜국이 건국되었을 것이다.
  이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 거서간 8년(B.C.50년) 조에 "왜인 군사가 변경을 침범하려다가 시조가 신과 같은 덕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곧 돌아갔다"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신라가 건국된 지 얼마지나지 않은 때에 왜국이라는 나라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군사를 보내 이웃나라를 침공하려 할 정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당서 권220 열전 제145 동이 왜(倭) 조를 보면, "그 왕의 성씨는 아매씨(阿每氏)인데, 스스로 말하기를 처음에는 나라의 주인을 천어중주(天御中主)라 불렀다고 하고 언렴(彦 )에 이르렀는데, 무릇 32세이다. 모두 존(尊)이라 불렀고, 축자성(筑紫城)에 살았다. 언렴의 아들 신무(神武)가 왕위에 올라 천황(天皇)이라 고쳐 불렀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왜국 왕실 선조의 가계를 알 수 있고, 신무 때에 이르러 왕위에 올랐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10대 숭신천황(崇神天皇)에 들어가 있는 "신(神)" 자는 무슨 의미일까?
  그를 왜국의 10대 천황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나라를 세운 사람은 아니라는 말이 되는데, 일본서기 숭신천황 12년 가을 9월 조를 보면 이상하게도 숭신천황을 "어조국천황(御肇國天皇)"이라 한다고도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에서 고구려의 6대왕을 태조대왕 또는 국조왕이라 기록함으로써 학자들이 그 의미를 아직까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어조국천황을 직역한다면 "나라를 처음 시작한 임금" 즉 나라의 개국시조라는 의미인데 어떻게 10대 왕에게 어조국천황이라는 시호를 붙일 수 있었던 것일까?    
  어느 사람은 이 기록을 보고는 숭신천황이 실제적인 왜국의 건국시조이고, 그 앞대의 천황들은 모두 가공의 인물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일본서기를 쓴 사람들이 모두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러한 이중적인 기록을 같은 책에 기록할 리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숭신천황을 어조국천황이라 했다고 기록한 뜻은 그가 왜국의 건국시조라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뜻이 담겨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숭신천황은 개화천황의 둘째 아들인데 개화천황에게는 세 왕비가 있었다.    그런데 개화천황이 죽자 개화천황의 세 왕비 사이에 왕권다툼이 일어났고, 결국 이향색미명이 승리하여 그 아들을 천황에 올리고 섭정을 하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섭정 12년째에 이르러 황태후인 이향색미명이 섭정을 거두고 그 아들 숭신에게 왕권을 돌려주게 되었는데, 이때 숭신천황은 백성들에게 부과되는 세금제도를 획기적으로 개선하게 된다.
  이는 숭신천황 12년 9월 조에, "처음으로 백성들을 조사해 과역을 새롭게 고쳤는데, 이는 남자들의 고기잡이와 사냥물 등에 관한 것과 여자들의 수공품 즉 베짜기 등에 관한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천지가 모두 화합하니 비바람도 때를 맞추어 내려주어 백곡이 잘 익었다. 집집마다 사람마다 충족하니 천하가 태평했다. 이로 인하여 칭송하여 어조국천황이라 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그를 왜 어조국천황이라 불렀는지 알 수 있게 한다.
  이때 숭신천황은 백성들에게 부과되는 세금제도를 아주 합리적으로 개선해 백성들의 형편에 맞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자 백성들의 살림살이는 점점 나아져 태평가를 부르게 되었고, 백성들은 숭신천황을 "어조국천황"이라 불렀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조국천황이란 나라를 건국한 임금이란 의미가 아니라 나라의 제도를 현실에 맞게 바꾸어 백성들을 잘 살 수 있도록 만들어준 위대한 임금이란 뜻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의 15대 응신천황(應神天皇)은 신공황후의 69년에 걸친 섭정기를 지나 왕위에 오른 사람이다.
  일본서기는 응신천황이 중애천황의 넷째 아들이라 기록하고 있으나 신공황후 69년의 섭정기를 지나 왕위에 오르고 또 그가 왕위에 올라서도 무려 41년 간이나 재위했었다는 기록을 보면 그는 중애천황의 손자쯤 되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중애천왕의 아들은 신공황후의 오랜 섭정기에 이미 죽었을 것으로 보여지고, 신공황후가 죽자 그 손자가 왕위를 이어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응신천황 3년 조를 보면, "이해 백제의 진사왕이 귀국(왜국)의 천황에게 무례했다. 그래서 기각숙미, 우전실대숙미, 석천숙미, 목토숙미를 보내 그 무례함을 나무랐다. 이 때문에 백제국은 진사왕을 죽여 사죄했다. 기각숙미 등은 아화(아신왕)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백제 아신왕이 숙부인 진사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때가 서기 392년이다.

 

☆ 신공황후를 왜국여왕 비미호와 동일 인물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연대가 맞지 않는다.

 

  어찌되었든 이때 왜국은 국력이 매우 강해져 해외로 눈을 돌렸던 것으로 보이고, 어느 정도 영향력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삼국사기 아신왕 6년(A.D.397) 조에 "여름 5월 왕이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태자 전지를 볼모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호태왕 비문을 보면, 396년에 백제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침공을 받고 한성이 함락되어 아신왕이 광개토대왕에게 남녀 1천명, 세포 1천 필을 바치며 무릎 꿇고 "앞으로 영원히 노객이 되어 따르겠습니다" 라고 맹세해야 했고, 58개성, 7백개 촌을 빼앗겨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이때 백제가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빼앗긴 58개성, 700개 촌은 후한 광무제가 살수 이남 땅에 설치했던 후한낙랑군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서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흥륭현 일원을 말하는 것이다.
  앞서 근초고왕이 고구려의 평양성을 침공하여 고국원왕을 화살에 맞아 죽게 한 후 전쟁에서 승리하여 그 땅을 고구려로부터 빼앗았다가 아신왕 때 이르러 광개토대왕에게 그 땅을 도로 빼앗긴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일이 있던 바로 다음 해에 다른 사람도 아닌 태자를 왜국으로 볼모로 보냈다면 이는 아신왕이 왜국의 군사력을 빌어 고구려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한 목적으로 태자를 왜국에 볼모로 보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고, 404년에 이르러서는 왜가 백제와 연합하여 대방을 침공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그렇다면 이때 왜국이 강력한 고구려에 맞설 수 있을 정도로 강해져 있었기 때문에 대방을 침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응신천황은 나라를 강국으로 만든 왕으로서 신에 대응할 만한 천왕이라는 의미로 그가 죽자 그의 시호에 "신(神)" 자를 붙여 응신천황이라 했던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결국
  신무천황은 왜국을 건국한 왕이라는 의미였고,
  숭신천황은 왜국의 제도를 획기적으로 혁신한 왕이라는 의미였으며,
  응신천황은 왜국을 강국으로 만든 왕이라는 의미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왜국 천황들의 시호에 "신(神)" 자를 붙인 의미였으나 우리가 지금까지 그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