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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미인들의 나라 동옥저는 한반도에 없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09. 3. 20. 04:50

윤여동설 - 미인들의 나라 동옥저는 한반도에 없었다 - 최초주장

 

 

  후한서 동옥저(後漢書 東沃沮)전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다.
  동쪽은 큰 바다까지이고, 북쪽은 읍루(挹婁)와 부여(夫餘), 남쪽은 예맥(濊貊)과 접했다.
  그 땅이 동서는 좁고, 남북은 긴데, 땅이 사방 천리의 절반쯤 된다.
  토질은 비옥하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어, 오곡이 잘 자라 밭에 씨를 뿌리면 농사가 잘된다.
  읍락에는 우두머리(長帥)가 있다.
  사람들의 성질은 정직하고, 강건하며, 용감하다.
  창을 잘 다루어 보병전을 잘한다.
  언어, 음식, 거처, 의복은 (고)구려와 유사하다.
  장사지낼 때에는 큰 나무 곽을 만드는데, 길이가 10여장이나 되며, 한쪽 끝 부분을 열어놓아 문을 만든다.
  새로 사람이 죽게되면 먼저 가매장하여, 가죽과 살을 모두 썩게 한 다음 뼈만 추려 곽 속에 안치한다.   
  온 집안식구의 유골을 모두 하나의 곽 안에 넣어두며, 살아있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목상을 새기는데, 죽은 사람의 숫자대로 한다.
  (한)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옥저 땅으로 현토군(玄莵郡)을 만들었다.
  뒤에 이맥의 침략을 받아 군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고는 옥저를 현으로 고쳐 낙랑(군)의 동부도위에 속하게 하였다.
  (후한) 광무제 때에 이르러 도위의 관직을 없애고, 후에 모두 그 거수(渠帥)를 봉하여 옥저후로 삼았다.
  그 땅이 작아 큰 나라의 사이에 끼어 핍박을 받다가 마침내 (고)구려의 신하가 되었다.
  (고)구려가 다시 대인을 사자(使者)로 삼아 읍락을 서로 감독하고 다스리게 하였으며, 조세로서 초(貂), 포(布), 어(魚), 염(鹽), 해산물을 징수하고, 미녀를 뽑아 비첩으로 삼았다.

  또 북옥저가 있어, 일명 치구루(置溝婁)라고도 하는데, 남옥저에서 8백여 리 떨어져 있다. 그 풍속은 모두 남옥저와 같으며, 국경의 남쪽으로 읍루와 접했다.
  읍루 사람들이 배를 타고 와서 노략질하기를 좋아하므로, 북옥저는 그들을 두려워하여 해마다 여름철에는 바위굴 속에 숨어살다가 겨울이 되어 뱃길이 통하지 않을 때가 되어야 내려와 읍락에서 산다.

 

  삼국지 동옥저(三國志 東沃沮)전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는데, 큰 바닷가에 산다.
  그 지형이 동북은 좁고, 서남은 길다. (땅이) 천리쯤이다.
  북쪽은 읍루와 부여, 남쪽은 예맥과 접했다. 백성이 5천 호이다.
  대군왕은 없고, 읍락에는 세습하는 우두머리(長帥)가 각각 있다.
  언어는 (고)구려와 대개 같지만 때때로 조금씩은 다르다.
  한나라 초에 연나라의 망명객인 위만이 조선의 왕이 될 때 옥저를 모두 복속시켰다.
  한 무제 원봉 2년(B.C.109) 조선을 정벌하여 위만의 손자 우거(右渠)를 죽이고, 그 땅을 나누어 네 군으로 만들었는데, 옥저성을 현토군(玄莵郡)으로 만들었다. 
  뒤에 이맥(夷貊)의 침략을 받아 군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겼는데, 지금 소위  현토의 옛 부(府)라는 곳이 바로 그 곳이다.
  옥저는 다시 낙랑에 속하게 되었는데, 한(漢)나라는 그 땅이 넓고, 멀어 단단대령(單單大嶺)의 동쪽을 나누어 (낙랑)동부도위(東部都尉)를 설치하고, 치소를 불내성(不耐城, 필자주 : 不而城의 오기로 보인다)에 두어 별도로 대령의 동쪽 일곱 개 현을 관할하게 하였다.   
  이때 옥저 역시 모두 현이 되었다.
  (후한) 건무 6년(A.D.30) 변경의 군을 줄일 때, 도위도 폐지하고, 그 후 모두 현의 거수(渠帥)로서 현후를 삼으니 불내(不耐, 필자주 : 不而), 화려(華麗), 옥저(沃沮) 등의 여러 현이 모두 후국(侯國)이 되었다.
  이적(夷狄)들이 서로 침공하고 싸웠으나, 오직 불내예후(不耐濊侯, 필자주 : 불이예후) 만이 지금에 이를 때까지 공조(功曹), 주부(主簿) 등의 여러 부서를 존치 시켰는데, 모두 예인이 차지하였다.
  옥저의 여러 읍락 거수들은 모두 스스로를 삼로(三老)라 칭하는데, 이는 옛 현이었을 때의 제도이다.
  (동옥저는) 나라가 작고, 큰 나라 사이에 끼어 있어 마침내 (고)구려의 신하가 되었다.

  (고)구려가 다시 대인을 사자로 삼아 다스리게 하였다.
  또 대가(大加)로 하여금 조세로서 담비가죽, 포, 생선, 소금, 해산물 등을 거두어 천리나 져 나르게 하고, 또 동옥저의 미인을 보내게 하여 비첩으로 삼았는데, 그들을 노복처럼 대우하였다.
  (동옥저의) 토질은 비옥하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어 오곡이 잘 자라며, 밭에 씨를 뿌리면 농사가 잘 된다.
  사람들의 성질은 정직하며, 강건하고, 용감하다.
  소나 말이 적고, 창을 잘 다루어 보병전을 잘한다.
  음식, 거처, 의복, 예절은 (고)구려와 비슷하다.  

 

 위략에는 그 나라의 혼인풍습은 여자의 나이가 열 살이 되기 전에 약혼하고, 신랑집에서는 그 여자아이를 맞아들여 장성할 때까지 길러 아내로 삼는다.
  (여자가) 성인이 되면 다시 친정 집으로 돌아가게 한다.
  여자의 친정에서는 돈을 요구하는데, (신랑집에서는) 돈을 지불한 후 다시 신랑집으로 돌아온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장사를 지낼 때에는 큰 나무 곽을 만드는데, 길이가 10여장이나 되며, 한쪽을 열어 놓아 입구를 만든다.
  새로 사람이 죽으면 모두 가매장을 하는데, 시신이 묻힐 만큼만 묻었다가 가죽과 살이 다 썩은 다음 뼈만 추려 곽 안에 안치한다.
  온 집안 식구를 모두 한 곽 속에 넣어 두는데, 죽은 사람의 숫자대로 살아 있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나무로서 모양을 새긴다.
  또 질그릇 솥에 쌀을 담아 곽의 입구 곁에 걸어둔다.
  관구검이 (고)구려를 토벌할 때, (고)구려의 왕 궁(宮: 위궁 즉 동천왕의 오기이다)이 옥저로 달아났으므로 (관구검이) 군대를 진격시켜 공격하고, 옥저의 읍락을 모두 파괴하고, 3천여 명의 목을 베거나 포로로 잡으니 궁(위궁)이 북옥저로 달아났다.

  북옥저는 일명 치구루(置溝婁) 라고도 하는데, 남옥저와는 8백여 리 떨어져 있다.
  그들의 풍속은 남, 북이 모두 동일하며, 읍루와 접해있다.
  읍루는 배를 타고 다니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하므로, 북옥저는 그들을 두려워하여 여름철에는 깊은 산골짜기의 바위굴에서 살면서 수비하고, 겨울철에 어름이 얼어 뱃길이 통하지 않으면, 내려와 촌락에서 생활한다.
 

 

[동옥저의 위치]


   동부여            개                            읍루 

                                                                                대해
                    마               
                              

                대                              읍루

                                                                                대해
            산                        동옥저                                                
                             

                                                               예(동예)            창해


                                                                                                                           

 

  옥저는 셋이 있었다.
  북옥저와 동옥저, 남옥저이다.
  그런데 이 옥저의 위치가 정확히 어떠했는지 확실하게는 알 수 없지만, 풍속이 같았다고 하는 것을 보면 원래 같은 부족이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나누어지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서에는 주로 동옥저에 대한 기록이 전해지고 북옥저, 남옥저는 단편적으로만 기록되고 있다.
  북옥저에 관한 기록이 삼국사기에 처음 나타나는 것은 고구려 시조 주몽 10년(B.C.28) 조로서 "겨울 11월 부위염을 시켜 북옥저를 쳐서 없애고, 그 지역을 고을로 만들었다"는 조문인데, 삼국지나 후한서에는 그 위치에 대하여 북옥저가 남옥저에서 8백 리 떨어져 있었으며, 그 북쪽에 읍루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읍루의 위치는 부여(동부여)의 동북쪽 1천여 리에 있다고 했고, 남쪽은 북옥저와 접했고, 북쪽은 끝을 모른다고 했다.
  부여(동부여)는 지금의 대흥안령 서쪽  정람기부근에 위치했던 것으로 비정되므로, 그 동북쪽 1천리에 읍루가 위치하고 있었다면 지금의 대흥안령산맥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고, 끝을 알 수 없다는 그 북쪽이란 지금의 시베리아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읍루는 그 지역이 산이 많고 험준하다 했고, 산 속에서 굴을 깊이 파고 그 속에서 산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감안해 보면, 거주환경은 필자의 주장과 일치한다고 하겠다.
  또한 그들이 독을 바른 화살인 호시(호矢)를 사용하므로 사람들이 두려워했다는 것으로 보아 그 지역이 옛 숙신 지역을 말하는 것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리고 북옥저 사람들은 읍루 사람들이 배를 타고 와서 노략질하기를 좋아하므로 여름철에는 산 속 바위굴속에서 살다가 겨울이 되어 어름이 얼어 뱃길이 통하지 않을 때가 되어야만 산에서 내려와 읍락에서 생활한다고 했으니 읍루에서 강으로 연결되는 강변에 살았다고 할 수 있고,  북옥저 사람들이 읍루의 약탈을 피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북옥저의 위치는 지금의 대흥안령 부근을 말하는 듯 하다. 
  동옥저의 위치는 전한낙랑군의 치소였던 하북성 승덕시의 동북쪽 방향인 내몽골 옹우특기, 적봉 부근에 위치했던 것으로 비정되므로 그 부근으로부터 북쪽 방향 8백 리쯤에 북옥저가 위치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으니 필자의 비정은 거의 정확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백제 온조왕 43년(A.D.25) 조에는, "겨울 10월에 남옥저의 구파해 등 20여인이 부양에 와서 정성을 보이므로 왕이 이들을 받아들여 한산의 서쪽에 배치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결국 남옥저는 백제, 신라와 가까운 거리에 위치했다는 말이 되는데, 신라는 요녕성 호로도 금주(錦州) 일원, 백제는 난하 하류 부근에 위치했던 나라였다.   
  또한 동옥저는 지금의 시라무렌하 남쪽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과거에는 시라무렌강 주변이 바다였을 것이고, 이곳이 초기 한사군의 현토군 지역이었으며 치소는 지금의 내몽골 옹우특기,적봉 부근으로서 동쪽이 바다였던 듯 하다.   

  한나라는 기원전 82년에 이르러 임둔군은 예족에게, 진번군은 맥족에게 빼앗기게되자 그를 없애고 두 군 즉 낙랑군과 현토군 만을 존속시켰다가 현토군이었던 옥저의 일부가 독립하게 되자 현토군을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게 된다.
  따라서 이곳 옥저의 일부는 낙랑군에 소속되었다가, 다시 단단대령 동쪽지역을 나누어 낙랑동부도위를 두게되자 낙랑동부도위에 속하게 되는데,
신라 혁거세 53년(B.C.5)에 이르러 동옥저는 신라에 사신을 보내 좋은 말 20마리를 바치며, "우리 임금이 남쪽의 한(南韓)에 성인이 났다는 말을 듣고 저를 보내 하례 드리는 것입니다"했다는 신라와의 접촉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하는데, 이때 동옥저에 무슨 변화의 조짐이 있자 주변국인 예(동예)와 신라와의 화친을 도모코자 했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왕망이 전한을 없애버리고 신나라를 건국하게 되자 낙랑태수 최리도 스스로 독립하여 낙랑국을 세우고 칭왕을 하게 되는데, 건무 6년인 서기 30년에 이르러 고구려의 대무신왕이 그 낙랑동부도위를 쳐서 빼앗고, 서기 37년에는 최리의 낙랑국 마저 멸망시켜버리게 된다.
  그리하여 이때 고구려는 옛 왕검조선의 도읍, 위만조선의 도읍이었으며, 전한 낙랑군의 치소였던 왕검성(王儉城: 왕험성이라고도 한다)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 고조선의 왕검성, 전한낙랑군의 치소, 고구려의 평양성, 고려의 서경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후한의 광무제가 한나라를 다시 복원하게 되자 광무제는 서기 44년에 군사를 보내 옛 낙랑 땅의 탈환을 모색하게 되는데, 이때 광무제는 옛 낙랑 땅 전부를 탈환하지 못하고 살수이남 땅 만을 탈환하여 그곳에 후한낙랑군을 다시 설치하게 되는데, 이때 동옥저와 동예가 고구려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후한낙랑군과 관계를 맺었던 듯 하다.  

  그러자 고구려 태조대왕은 서기 56년에 이르러 이곳 동옥저를 침공하여 나라를 없애고 고구려에 편입시켜 버리게 되어, 동옥저가 이때에 이르러 역사에서 완전하게 사라지게 되고, 동예 역시 고구려의 영향권 내에 속하게 된다.

  그리하여 태조대왕은 전략적 요충지인 이 동예의 책성(명주)을 수시로 방문하여 중요시 관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