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신라 진덕여왕이 당 태종을 짝사랑했었다고?
신라 28대 진덕여왕의 이름은 승만이고, 출생시기는 정확히 전해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국반갈문왕[필자주 : 삼국유사 손보기본에는 國眞安葛文王이라 했다]이고 어머니는 월명부인[삼국유사에는 아니부인이라 했다]으로 기록되고 있다.
26대 진평왕[이름은 백정(白淨)이다]에게는 두 명의 형제가 더 있었는데, 바로 아래 동생은 백반(伯飯)이었고, 둘째 동생은 국반(國飯)이었다.
27대 선덕여왕은 진평왕의 딸이었고, 백반의 후손은 역사에 나타나지 않고, 28대 진덕여왕은 국반의 딸이었다.
[진덕여왕의 세계도]
24대진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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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륜 25대진지왕(금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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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대진평왕 백반 국반 용수 용춘
(국진안갈문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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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 27대선덕여왕 28대진덕여왕 29대태종무열왕
진평왕의 딸 선덕여왕의 출생년도가 587년경으로 추정되므로 진평왕의 둘째 동생 국반(국진안갈문왕)의 딸인 진덕여왕은 선덕여왕보다 약 10세정도 아래였다고 볼 수 있어 서기 597년경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그랬다가 선덕여왕이 약 60세쯤의 나이로 죽고 아들이 없자 사촌여동생인 진덕여왕이 왕위를 잇게 되는데, 왕위에 오를 때 진덕여왕의 나이는 50세쯤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생전에 혼인을 했었다는 기록이 일체 나타나지 않고 또 자녀에 관한 기록도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는 진덕여왕의 모습을 "승만(진덕여왕)은 외모가 풍만하고 아름다웠다. 키가 7척(161cm, 고대의 1척은 지금의 23cm)이고 팔이 길어 늘어뜨리면 무릎아래까지 닿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진덕여왕의 몸은 약간 통통했고 얼굴은 예뻤으며, 늘씬했고, 팔이 유난히 길었던 듯 하다.
그녀는 왕위에 올라 안으로는 선덕여왕 말년에 난을 일으켰던 비담을 비롯한 그 일당 30여명을 참수하는 것으로 왕의 업무를 시작해야 했고, 밖으로는 백제의 침공을 물리쳐야 하는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잘못하다가는 사직이 위태로운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신라로서는 살아남기 위해서 당나라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골치 아픈 정치적인 상황을 논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라의 진덕여왕이 당 태종을 짝사랑했었을 것이라는 좀 황당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진덕여왕은 재위 4년인 서기 650년에 이르러 태평송(太平頌)이라는 시를 비단에 수놓아 당나라에 보내기도 하고, 재위 7년에는 금총포(金摠布)라는 옷감을 짜서 보내기도 하는데, 이때 당나라에서는 649년에 당태종이 죽고 당고종이 황제에 올라 있던 때였다.
태평송의 내용을 보면,
"위대한 당나라가 왕업을 창건하니 황제의 높은 포부 장하기도 하여라.
전쟁을 그치니 군사들은 시름없고 문교에 힘을 쓰니 대대로 이어지리.
하늘을 대신하여 은혜를 베푸니 만물이 다스려져 저마다 빛을 발하네.
끝없는 어진 덕은 해와 달과 조화되어 시운을 어루만져 태평세월 지향하네.
깃발은 어찌 그리 빛나고 나부끼며 군악소리 유달리도 우렁차게 들리누나.
황제명령 거역하는 외방의 오랑캐는 한 칼에 멸망하는 천벌을 받으리라.
풍속은 순박하고, 좋은 일이 경쟁하듯 일어나니, 시절은 옥촉처럼 화합하고, 해와 달도 만방을 고루 비추리.
하늘은 명재상을 내려주시고 황제는 충성스런 신하를 임명하니 삼황오제의 덕과 같으니 당나라는 영원하리"
라는 아첨성 내용인데, 이해하기에 따라서는 당 태종의 업적을 추모하는 내용으로 보이기도 한다.
물론 시를 비단에 수놓아 보내는 것이야 섬세한 여왕의 치세였으니 그럴 수 있다손 치더라도, 신라의 여왕이 당나라의 남자황제인 당 고종이 입을 옷감을 짜서 보낸다는 것은 어딘가 좀 이상한 것이다.
그리하여 좀 엉뚱한 발상이기도 하고 세상 어디에도 그러한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진덕여왕이 혹시 당 고종의 아버지인 당 태종을 짝사랑했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태종이 아직은 젊은 51세의 나이에 갑자기 죽게되고 당 고종이 황제에 오르자 그 아쉬움을 마음에 담아 태평송을 짓고 그를 비단에 수놓아 보내기도 하고 죽은 당태종을 생각하며 손수 금총포를 짜서 보낸 것이 아니었나 싶은 것이다.
왜냐하면 진덕여왕 치세에 신라에서 요구한 것을 당 태종이 거부한 경우가 없었고, 당 태종이 선덕여왕에게는 부인이 왕위에 있기 때문에 신라가 이웃나라의 업신여김을 받는 것이 아니겠느냐라는 말을 했었으나 진덕여왕도 여왕이기는 마찬가지이나 당 태종은 진덕여왕에게는 그러한 말을 하지 않았고, 신라는 진덕여왕 때 이르러 스스로의 연호를 버리고 당나라의 연호를 사용하고 또 중국의 복장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를 단순하게 신라와 당나라가 아주 친밀한 시기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혹시 진덕여왕과 당 태종은 우리가 지금 모르는 어떠한 교감을 나누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당태종은 서기 599년생이고, 진덕여왕은 597년생쯤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그들은 거의 동년배이다.
그리고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된 때인 618년에 승만(진덕여왕의 이름)의 나이는 20여세였을 것인데, 이때 신라에도 영웅호걸의 풍모를 지닌 당나라의 왕자 이세민에 대한 인물됨이나 활동상황이 많이 전해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승만은 이때부터 당나라 왕자 이세민을 남모르게 사모하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지만 승만은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았고 시집도 가지 않았으며, 세월은 흘러 626년에 이르자 이세민은 당나라의 황제에 오르게 된다.
이때 승만의 나이도 30여세쯤이 되었지만 승만은 여전히 독신을 고집하며 마음 속으로 당 태종을 사모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또 세월이 흘러 선덕여왕이 60세쯤의 나이로 죽고 왕위를 이을 사람이 없자 신라에서는 승만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했고, 비록 50세쯤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당 태종을 향한 진덕여왕의 마음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당 태종은 진덕여왕 때인 649년 7월 10일에 장안의 함풍전에서 51세의 나이로 죽어 지금의 서안 부근 섬서성 예천현 동북 50리에 묻혔고, 진덕여왕은 그로부터 5년 후인 654년 3월에 죽어 신라 서라벌(금성) 사량부(돌산고허촌, 남산촌)에 묻힌다.
그런데 당 태종의 능을 소릉(昭陵)이라 하는데, 소릉도(장안지도 권중 당소릉도 하)를 보면, 이상하게도 그곳에 "신라진덕묘(新羅眞德墓)"가 표시되어 있는 것이다.
소릉출토 "신라"명문(신라낙랑군왕김진덕의 일부로 추정됨)
묘(廟)는 신위를 모시는 사당이라 할 수 있지만 묘(墓)라는 것은 유골을 묻었다는 의미일 것인데, 삼국사기에 신라의 서라벌(금성) 사량부에 묻힌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신라 진덕여왕의 능이라는 의미의 "신라진덕묘"가 신라로부터 수천리나 떨어져 있는 당나라 장안(현 서안) 부근의 당 태종릉인 소릉을 그린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다른 것도 아닌 정관의 치로 유명한 당나라 2대 황제의 능인 소릉도를 그릴 때 있지도 않은 신라진덕묘를 멋대로 그려 넣었을 리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신라진덕묘"가 소릉에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을 것인데,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그냥 당나라에서 황제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하여 당태종 때 당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이웃나라 왕들의 가묘를 만들었던 것일까?
일반인의 묘에도 문무석이나 동자석 같은 것을 깎아 세우듯이 황제의 능이므로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돌로 주변국의 비석을 만들어 세운다거나 석상을 깎아 세운다던가 하는 것이야 가능하다고 하겠지만 어떻게 시신도 들어 있지 않은 가묘를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우리가 아직 잘 모르고 있는 내막이 있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혹시 신라의 진덕여왕은 죽으면서 자신이 평생 사모했던 당태종의 능 옆에 묻어달라고 유언하고 죽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신라에서는 654년에 진덕여왕이 죽자 일단 서라벌(금성)의 사량부에 묻었다가 후일에 이르러 진덕여왕의 유언을 실천하기 위하여 그 뼈를 파 가지고 당나라로 가서 당태종의 소릉 능역에 진덕여왕의 뼈를 묻어주었던 것일까?
아니면 진덕여왕이 죽자 화장을 하여 그 일부는 신라 사량부에 장사지내고, 일부는 당나라 소릉에 장사지냈을까?
그리하여 그때부터 당 소릉지도에 "신라진덕묘"가 표시될 수 있었던 것일까?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신라의 진덕여왕은 평생 누구에게도 말못하고 혼자 마음속으로만 짝사랑해야 했던 님 곁에 죽어서라도 묻혔다는 말이 된다.
정말 신라의 진덕여왕은 당 태종을 짝사랑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