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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온조왕 탄생설화와 백제 건국 - 최초주장

윤여동 2009. 4. 15. 02:51

윤여동설 - 온조왕 탄생설화와 백제건국 - 최초주장

 

  백제의 건국시조 비류왕과 온조왕의 혈통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기록에 나타난 탄생설화를 정리해 보면,
  주몽과 졸본부여 공주 사이 탄생설,
  주몽과 월군여인 사이 탄생설,
  우태와 소서노 사이 탄생설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리고 어느 사람은 비류는 우태와 소서노 사이에서 출생했고, 온조는 주몽과 소서노 사이에 출생한 이부동모(아버지는 다르고 어머니는 같다는 의미) 사이였을 것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하는데, 근거 없는 주장이다.

 

  주몽과 졸본부여 공주 사이 탄생설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백제 시조 온조왕은 그의 아버지가 추모인데 혹은 주몽이라고도 한다. 주몽이 북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더니 부여왕이 아들은 없고 다만 딸만 삼형제가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둘째 딸로서 아내를 삼게 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서 부여왕이 죽고 주몽이 그 왕위를 이었다. 주몽이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자는 비류요, 차자는 온조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이 기록만을 본다면 비류와 온조가 틀림없이 주몽과 졸본부여 둘째 공주와의 사이에서 탄생한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

 

  주몽과 월군여인 사이 탄생설은,
  삼국사기의 주에 "혹은 주몽이 졸본에 이르러 월군여인에게 장가를 들어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 라고 부기해 놓았기 때문에 대두된 설이다. 

 

  우태와 소서노 사이 탄생설은,
  비류와 온조는 주몽의 혈통을 이어받지 않고 우태와 소서노 사이에서 탄생했다는 주장이다.

  이는 삼국사기에 "일설에는 시조 비류왕은 그 아버지가 우태이니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요, 어머니는 소서노이니 졸본사람 연타발의 딸로서 처음 우태에게로 시집을 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큰아들은 비류요, 둘째 아들은 온조였다.
  우태가 죽은 뒤 졸본에 홀로 살았는데 그 후 주몽이 부여(필자주 : 동부여이다)에서 용납되지 못하고 전한 건소 2년 봄 2월에 남쪽 지방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으며, 소서노에게 장가를 들어 왕비를 삼았다"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주장하게 된 설이다.


  그리고 또 비류는 우태의 아들이고 온조는 주몽의 아들일 것이라고 하는 설은, 소서노가 우태와 혼인했다가 우태가 죽은 뒤 주몽과 다시 혼인했었다는 기록과 주몽을 동명성왕이라고 기록한 삼국사기의 기록 그리고 온조가 주몽이 죽고 난 그 다음해에 십제를 건국하고 맨 처음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다는 것을 주몽의 사당을 세운 것으로 오해하여 생겨난 주장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어느 기록도 비류와 온조 형제가 아버지가 다르고 어머니가 같은 이부동모 사이라고 기록하고 있지 않고 친형제로 기록하고 있어 주장에 신빙성이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여러 주장 중 어느 설이 진실일까?
  제반 상황을 종합해 보면 비류왕과 온조왕은 "우태와 소서노 사이 출생설"이 역사적 진실일 것이다.     
  소서노는 졸본사람 연타발의 딸로서 기원전 66년 생이고, 주몽은 기원전 79년 생으로서 22세 때인 기원전 58년에 동부여로부터 졸본부여로 도망쳐 와서 졸본부여 둘째 공주와 혼인했고 졸본부여왕이 죽자 그 왕위를 물려받아 왕위에 올랐는데, 이때 소서노의 나이는 9세에 지나지 않았다.   
  그 후 소서노는 자라서 졸본부여 동명왕의 손자인 우태와 혼인을 하여 두 아들인 비류와 온조를 낳았던 것으로 보인다.

 

☆ 삼국사기에는 우태를 해부루의 서손이라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으로서 우태는 졸본부여 건국시조 동명왕의 손자일 것이다.
  왜냐하면 고구려나 백제가 같은 부여에서 발원했지만 고구려 왕실의 원래 성씨는 해씨였고, 백제 왕실의 성씨는 부여씨였기 때문인데, 해씨의 시조는 북부여 건국시조 천제 해모수였고, 부여씨의 시조는 졸본부여 건국시조 동명왕이었다.[필자주 : 실제 부여씨의 시조는 단군왕검의 막내아들이었던 부여였다. 단군왕검이 막내아들인 부여를 나라의 서쪽 땅에 봉했기 때문에 그로부터 부여가 나라이름이 되었고, 성씨가 되었다] 
  따라서 후일 백제왕실의 성씨를 부여씨라 했다는 것은 온조왕이 부여씨라는 의미이고, 온조왕의 아버지인 우태 역시 부여씨라는 의미이며, 시조인 동명왕 역시 부여씨라는 의미인데, 그렇다면 동명왕의 원래 이름은 부여두막(또는 부여두막루라고도 한다)였을 것이고, 원래 단군왕검의 막내아들인 부여의 후손으로서 왕검조선의 왕족이었을 것이고, 졸본지역의 호족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둘째아들인 온조가 태어난 얼마 후 그 아버지인 우태가 젊은 나이로 죽게되자 그 어머니인 소서노는 애 둘 딸린 젊은 과부가 되어 졸본에 홀로 살고 있었는데, 이때 마침 주몽이 혼인했던 졸본부여 공주가 죽게 되었고(필자주 : 필자가 보기에는 주몽과의 사이에서 딸만 하나 낳아 놓고 일찍 죽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졸본부여의 왕위에 올라 있던 주몽은 다시 왕후를 구해야 했을 것인데, 이때 주몽은 아들 둘 딸린 과부 소서노를 왕비로 선택한다.
  이때 주몽이 왜 명문가의 처녀를 새로운 왕비로 간택하지 않고 아들이 둘이나 딸린 과부 소서노를 왕비로 맞아들였는지 그 이유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이때 주몽이 처한 상황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가능한 선택이었다고 판단된다.  즉 동부여에서 졸본으로 도망쳐 와 졸본부여에서의 정치적 기반이 약했던  주몽으로서는 자신의 절대적인 지지기반이었을 졸본부여 둘째 공주가 죽게 되자 지지기반이 급격히 약화되었을 것이다.
  그러자 주몽은 졸본부여의 호족이었으며 갑부였던 연타발을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애 둘 딸린 연타발의 딸 소서노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고, 소서노의 입장으로서는 자신에게는 졸본부여 건국시조 동명왕의 혈손인 비류와 온조라는 두 아들이 있었으므로 주몽과 혼인함으로써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봉해 주몽의 뒤를 이어 다음 왕위에 올리려고 했을 것이다.

 

☆ 주몽(해씨)은 졸본부여 둘째 공주와의 사이에서는 아들은 얻지 못했고 딸만 하나 낳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딸이 성장하여 고씨에게 시집가서 낳은 후손들이(6대 태조대왕으로부터) 후일 고구려의 왕위에 올랐던 듯하다.   

 

  그런데 주몽이 동부여에서 졸본으로 도망칠 때 동부여에 남겨 놓고 온 유리라는 아들 때문에 소서노의 이러한 계획이 뜻대로 되지 않자 그녀는 두 아들을 데리고 기원전 42년인 기묘년에 졸본을 떠나 진번 부근땅으로 가버리게 되고, 기원전 37년에 이르러 주몽은 졸본부여의 국호를 고구려로 바꾸게 된다.

 

☆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는 "고주몽은 재위 시에 말하기를 '만약 적자인 유리가 오게 되면 마땅히 태자로 봉할 것이다' 라고 했다.
  소서노는 장차 두 아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음을 염려하여 기묘년 3월에 패대의 땅이 기름지고 산물이 풍부하고 살기 좋다는 말을 사람들에게 듣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번지간에 이르렀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비류와 온조가 주몽의 혈통이 아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 소서노가 졸본을 떠나 패수와 대수 사이의 땅인 진번으로 가게 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기묘년이란 고구려가 건국되기 전인 기원전 42년을 말하는 것이므로 이때 주몽이 졸본부여의 왕위에 올라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기록이고, 이때 비류와 온조는 어린아이였다.
  우리는 지금 주몽의 아들 유리가 기원전 19년 동부여로부터 도망쳐 와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가 그때 졸본을 떠나 진번 부근 땅으로 가서 백제를 건국했다고 알고 있으나 사실은 그보다 훨씬 전에 졸본을 떠났던 것으로 나타난다.    

 

  한편 소서노는 기원전 42년에 어린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진번 부근 땅으로 가서 처음에는 농사를 지어 10년 만에 사방 반 천리의 땅이 소서노의 것이 되었다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진번 부근 땅이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진황도 도산(필자주 : 백제의 북한산이다)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기원전 19년 주몽이 죽고 동부여에서 도망쳐 온 유리가 고구려의 2대 왕위에 오르자 소서노는 다음 해인 기원전 18년에 자신이 개척한 진번 남쪽 한산(漢山) 부근 땅에 두 아들로 하여금 나라를 세우게 하는데, 이때 비류와 온조는 한산 부아악에 올라 도읍할 곳을 물색하게 된다.

 

  결국 비류는 서쪽 물가인 미추홀에 도읍하고 국호를 백제라 하게 되고,

  온조는 동쪽 한수 물가의 위례성에 도읍하고 십제라 했는데,

  기원전 6년경 형인 비류왕이 갑자기 죽자 온조왕이 비류의 백제를 통합한 후 도읍을 남한성으로 옮기고,

  국호를 새롭게 백제라 함으로써 우리 역사에 백제를 등장시키는 것이다.


  온조왕은 나라를 세우고 맨 처음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는데, 이는 고구려의 건국시조인 주몽의 사당을 세웠다는 말이 아니라 사실은 졸본부여의 건국시조인 동명왕의 사당을 세운 것이다.
  온조왕은 주몽의 아들이 아니라 졸본부여 동명왕의 증손자로서 부여우태의 아들이었다.

  주몽왕(추모왕)과 온조왕은 혈통이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주몽왕(추모왕)은 북부여 건국시조 천제 해모수의 후손으로서 해씨였고,

  온조왕은 졸본부여 건국시조 동명왕(부여두막루)의 후손으로서 부여씨였고, 옛 왕검조선의 왕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