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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발해의 건국지 동모산(東牟山) 위치 찾기 - 최초공개

윤여동 2009. 5. 8. 01:36

윤여동설 - 발해의 건국지 동모산(東牟山) 위치 찾기 - 최초공개

 

  [발해 중경현덕부 추정지 : 내몽골 파림우기]

 

  구당서 발해말갈 전에,
  “조영은 마침내 그 무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가서 읍루(필자주 : 원문은 계루로 되어 있으나 오기이므로 필자가 고쳤다)의 옛 땅을 차지하고 동모산(東牟山)에 웅거하여 성을 쌓고 살았다.
  조영이 굳세고 용맹스러우며, 용병을 잘하자 말갈의 무리 및 고구려의 남은 무리가 점점 모여들었다.
  성력(A.D.698~699) 중에 스스로 진국왕(振國王)에 올라 돌궐에 사신을 보내 통교하였다.
  그 땅은 영주(營州) 동쪽 2천리에 있으며, 남쪽은 신라와 접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신당서 발해 전에는, 
  “발해(渤海)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로서 고(구)려에 부속되어 있었으며, 성은 대(大)씨이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무리를 이끌고 읍루(挹婁)의 동모산(東牟山)을 차지하였다. 그곳은 영주(營州)에서 동쪽으로 2천리에 있으며, 남쪽은 신라와 닿아 니하(泥河)를 경계로 삼고, 동쪽은 바다까지이며, 서쪽은 거란까지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또
  “만세통천(A.D.696) 중에 거란의 이진충이 영주도독 조홰(조문홰)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사리 걸걸중상이라는 자가 말갈의 추장 걸사비우 및 고구려의 남은 무리를 이끌고 동쪽으로 달아나 요수(遼水)를 건너 태백산 동북쪽을 거점으로 하여 오루하를 사이에 두고 성벽을 쌓아 수비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영주에서 동쪽의 동모산으로 갈 때는 요수를 건너고, 태백산을 넘어야 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고, 발해가 “부여, 옥저, 변한[필자주 : 예(예,맥)의 오기일 것이다], 조선 등 바다 북쪽 여러 나라의 땅을 거의 차지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 발해는 옥저(북옥저) 땅에 남경남해부를 설치했고, 예(동예)의 땅에 동경용원부를 설치하였다. 이는 이때 발해가 옥저(북옥저) 땅과 예(동예) 땅도 차지했었다는 증거이다.  

   
  이 기록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는 걸걸중상(대중상)이 지금의 요하를 건너 동쪽 백두산을 넘어 그 동북쪽 동모산에 자리잡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한반도 백두산 동북쪽에서 동모산을 찾으려 했고, 발해의 건국지가 그 부근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설상가상으로 길림성 돈화의 육정산(六頂山)에서 발해의 3대왕이었던 문왕 대흠무의 둘째 딸인 정혜(貞惠)공주의 묘가 1949년에 발굴되었고, 길림성 화룡 용두산(龍頭山)에서 문왕의 넷째 딸인 정효(貞孝)공주 묘가 1980년에 발굴되어 그 부근이 발해의 건국지가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발해에서 공주가 성장하자 국가 정책상 주변 제후국에 시집을 보냈고, 그곳에서 죽어 묻혔다면 이야기는 많이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한국 여인이 저 멀리 한반도의 지구 반대편인 아르헨티나로 시집을 갔고, 그곳에서 죽어 묻혔는데, 천년 후에 그 무덤을 발굴해 보니 그 무덤의 주인공이 한국 여자라고 기록해 놓은 지석이 발견되었다고 하여, 그 지석을 근거로 그곳 아르헨티나에 한국이 있었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매우 곤란한 일이다.
  신당서 발해 전을 보면, 발해의 왕들이 인안 · 대흥 · 중흥 등 연호를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발해의 왕들이 황제를 칭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황제의 나라인 발해에서 주변 나라를 부마국으로 묶어두기 위하여 정책적으로 공주들을 그곳으로 시집보냈는데, 공주가 그 나라에서 자식을 낳고 살다가 죽게 되었다면 그 시신은 당연히 그 나라의 왕실 무덤군에 묻히게 되었을 것이다.
   사실이 그러하다면 그곳에서 발해 공주의 무덤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그곳이 곧  발해의 도읍지라고 할 수는 없고, 건국지라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고대의 요수란 지금의 영정하를 말하는 것이고, 영주(營州)는 지금의 중국 북경 서쪽 영정하부근에 위치했었다.    
  따라서 영주에서 동쪽(동북쪽)으로 2천리 거리는 지금의 대흥안령 부근이 된다.
  그렇다면 대조영은 영주를 출발하여 동북쪽으로 요수를 건너고 압록강을 건넌후, 다시 태백산을 넘어 동모산에 도착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아버지 대중상의 뒤를 이어 대진국(大震國)의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그런데 후일 중국에서는 그곳을 홀한주 발해군이라 했고, 그곳의 왕들에게는 홀한주도독 발해군왕이라는 작위를 보냈고, 후일에 이르러서는 발해국으로 고쳐 발해국왕이라고 했다.

  발해의 첫 도읍 동모산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발해의 건국지 중경현덕부는 지금의 서랍목륜하(시라무렌강) 북쪽 파림우기(巴林右旗) 부근으로 비정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파림우기 부근의 어느 산이 옛 동모산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