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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선덕여왕 - 우리 역사 최초의 여황제

윤여동 2009. 5. 31. 07:06

윤여동설 - 선덕여왕 - 우리 역사 최초의 여황제

 

    

                                                            

선덕여왕의 출생

 

  선덕여왕은 우리 역사상 여자로서 왕위에 오른 최초의 인물이다.
  그녀는 어떻게 남자만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그 옛날에 금기를 깨고 당당하게 신라의 왕위에 오를 수 있었고, 16년 간이나 재위할 수 있었으며, 그 혼란한 시대를 헤쳐나갈 수 있었던 것일까? 
  선덕여왕의 아버지는 신라 26대 진평왕이고, 어머니는 마야왕후이다. 
  성은 김씨요, 이름은 덕만(德曼)이다.
  진평왕의 둘째 딸로서 태어난 시기는 정확히 전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버지인 진평왕이 567년에 태어나 13세 때인 서기 579년에 즉위하여 재위 54년인 632년에 66세의 나이로 죽었으므로 그 둘째 딸인 선덕여왕은 587년경 태어나 즉위할 때 약 46세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 삼국사기에는 선덕여왕이 진평왕의 장녀로 기록되어 있으나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진평왕의 장녀는 천명공주이고, 둘째는 덕만공주라고 하고, 그 외에도 양명공주와 우약공주가 있었다고 하고, 삼국유사에는 백제 무왕의 부인이 신라 진평왕의 셋째딸 선화공주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결국 진평왕에게는 모두 5명의 공주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한때 선덕여왕의 남편이었고 김춘추의 아버지로 기록되고 있는 김용춘은 578년생이었고, 김춘추는 603년생이었으며, 김유신은 595년생이었다.

   

[선덕여왕의 세계도]
                           24대 진흥왕
                                ↓
                .......................................................
               ↓                                                    ↓
              동륜                                          25대 진지왕
       .......................................              .....................
      ↓                 ↓                 ↓             ↓                 ↓
  26대진평왕      백반              국반         용수             용춘
  ...................                                       
 ↓                ↓                       ↓                                ↓           
천명 27대 선덕여왕        28대 진덕여왕              29대 태종무열왕  

 

선덕여왕의 예지력

 

   삼국유사 선덕왕 지기삼사 조를 보면, 선덕여왕이 미리 안 세 가지 일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첫째는 당 태종이 세 가지 색으로 그린 모란꽃 병풍과 그 씨를 보내온 적이 있었는데, 그 그림에 나비와 벌이 그려져 있지 않은 것을 보고 모란꽃이 향기가 없음을 알았다고 하고, 둘째는 영묘사 옥문지에 겨울인데도 개구리들이 많이 모여들어 며칠 간 울어대는 것을 보고 여근곡에 적병이 숨어 있음을 알았다고 하며, 셋째는 자기가 죽을 날이 언제 언제이니 자신이 죽거든 도리천에 묻어달라고 예언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도리천이란 전설 속의 장소이기 때문에 신하들은 그 도리천이 구체적으로 어디를 말하는지 알 수 없어 다시 물었더니 여왕이 대답하기를 낭산 남쪽이라고 대답했다고 하는데, 신하들은 선덕여왕이 왜 그곳을 도리천이라고 말했는지 선덕여왕이 죽고 난 한참 후에야 깨닫게 된다. 
  이를 보면 선덕여왕은 재기 발랄하고, 초능력에 가까운 예지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선덕여왕의 혼인

 

  화랑세기 13세 풍월주 용춘공 조를 보면,
  "이때 대왕(진평왕)은 적자가 없어 용춘공의 형 용수전군을 사위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다. 이에 (용수)전군이 (용춘)공에게 물으니 공이 대답하기를, '대왕의 춘추가 한창 강성할 때인데 혹시 왕위를 이으면 불행할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이에 (용수)전군은 사양하였으나 마야왕후가 들어주지 않고 마침내 (용수) 전군을 사위로 삼으니 곧 천명공주의 남편이다.
  이에 앞서 (천명)공주는 마음 속으로 용춘(공)을 사모하여 황후에게 조용히 말하기를 '남자는 용숙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였는데, 황후가 용수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시집을 잘못 보냈던 것이다.
  (천명)공주는 이에 (용춘)공에게 은밀히 말하기를 '첩이 본래 사모한 사람은 곧 그대입니다' 하니 (용춘)공이 말하기를 '가정의 법도는 장자가 귀한 것인데 신이 어찌 감히 형만 하겠습니까?' 하였다.
  (천명)공주는 공을 더욱 사랑하여 제(진평왕)에게 (용춘)공의 처지를 떠받쳐 주게 하였고, 여러 차례 (용춘)공의 벼슬을 승진시켜 그 품위가 용수공과 같게 만들었다.  용수공이 공주의 뜻을 알고 공주를 (용춘)공에게 양보하려 하였으나 공이 극구 사양하였다.
  마야왕후가 밤에 궁중에서 잔치를 베풀고 (용춘)공을 불러 (천명)공주와 함께 묵도록 하였다.
  용수공 또한 늘 병을 칭하고 (용춘)공에게 공주를 모시고 공주의 마음을 위로하도록 명하였다. (용춘)공은 스스로 게으르거나 방자한 적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공은 대궐에서 더욱 신임을 받았다."
  "선덕공주가 점점 자라자 용봉의 자태와 태양의 위용을 갖추어 왕위를 이을 만 하였다. 그때는 마야왕후가 이미 죽었고, 왕위를 이을 아들이 달리 없었기 때문에 대왕(진평왕)은 (용춘)공을 마음에 두고 (천명)공주에게 그 지위를 양보하도록 권하였다. (천명)공주는 효심으로 순종하였다. 이에 그 지위를 양보하고 출궁하였다.
  선덕은 (용춘)공이 능히 자기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여 사신이 되어 줄 것을 청하였다.
  대왕이 이에 공에게 공주의 뜻을 받들도록 명하였다.
  선덕은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감정이 풍부하였다.
  (용춘)공이 감당하지 못할 것을 알고 굳이 사양하였으나 어쩔 수 없이 받들게 되었는데, 과연 자식이 없어 물러날 것을  청하였다.
  대왕은 용수공에게 모시도록 하였는데, 또한 자식이 없었다."
  "용수전군이 죽기 전에 부인과 아들을 (용춘)공에게 맡겼다.
  그 아들은 곧 우리 태종황제이고 부인은 곧 천명공주이다.
  앞서 용수공은 천화공주를 아내로 맞았었는데, 천명공주를 아내로 맞게 되자 천화공주를 (용춘)공에게 주었다. 아들을 낳았는데 일찍 죽었다.
  (용춘)공이 선덕공주를 모시게 되자 제(진평왕)가 천화공주를 백룡공에게 내려주었다.
  선덕공주가 즉위하자 (용춘)공을 남편으로 삼았는데, 공은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스스로 물러날 것을 청하였다.
  군신들이 삼서의 제도를 논의하여 흠반공과 을제공으로 하여금 보좌하도록 하였다.
  (용춘)공은 본래 금륜(진지왕)이 색에 빠져 폐위된 것을 슬퍼하였고, 성품이 색을 좋아하지 않아 왕을 즐겁게 해줄 수 없었기 때문에 물러날 뜻이 더욱 굳어졌다.
  선덕은 이에 정사를 을제에게 맡기고 공에게 물러나 살기를 허락하였다.
  물러난 (용춘)공은 천명공주를 처로 삼고, 태종을 아들로 삼았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그 내막을 자세히 알 수 있어 선덕여왕이 한때 용춘과 혼인을 했었으나 그 사이에서 자식을 얻지는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의 남편이 "음갈문왕(飮葛文王)"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그렇다면 혹시 선덕여왕의 첫 남편이 음갈문왕이었는데 일찍 죽자 용춘을 두 번째 남편으로 받아들였고, 다시 흠반과 을제를 세 번째, 네번째 남편으로 맞아들였던 것이었을까?
  그러나 선덕여왕은 결국 어느 남자와의 사이에서도 자식을 얻지 못했으니 그녀 자신이 아이를 잉태할 수 없는 석녀였던 것으로 보인다.                

 

선덕여왕의 왕위 계승        

 

  원래 선덕여왕은 신라의 왕위에 오를 수 없는 인물이었다.
  당시까지 역사상 여자가 왕위에 오른 적이 없었고, 더구나 진평왕의 둘째 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진평왕도 처음에는 장녀인 천명공주를 진지왕의 장자인 용수와 혼인시킨 후 사위인 용수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었는데, 전해지지 않은 어떠한 이유로 그것은 중지되어 버렸다.
  이를 두고 혹자는 용수가 왕위에서 쫓겨난 진지왕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이유로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 후에도 진평왕이나 천명공주, 선덕여왕 등이 용수 · 용춘과 밀접한 관계를 계속 유지하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든 마야왕후가 죽고 승만부인을 두 번째 왕후로 맞아들인 이후 진평왕은 둘째 딸인 덕만(후일의 선덕여왕)을 직접 후계자로 정하게 되는데, 이때 진평왕이 우리 역사상 한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딸에게 왕위를 직접 전해줄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었고, 당시 신라의 왕실이나 대신들도 그러한 조치에 반대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당시 신라로서는 어쩔 수 없는 내부 사정이 있었을 것이나 그 이유는 전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후에도 선덕여왕은 계모인 승만왕후가 아들 하나를 낳게 되어 왕위가 그 아들에게로 넘어갈 뻔했으나 그 아들이 일찍 죽게 되어 결국 선덕여왕이 진평왕의 뒤를 이어 신라 27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물론 삼국유사에는 신라왕실에 성골의 남자가 없었기 때문에 선덕여왕이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 진덕여왕 조에는 "나라 사람들이 이르기를 시조 혁거세로부터 진덕왕까지 28왕을 성골(聖骨)이라 하고, 무열왕으로부터 끝의 임금까지를 진골(眞骨)이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기는 한데, 성골과 진골을 구분하는 기준이 무엇인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진골로 분류되고 있는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경우 진평왕의 장녀인 천명공주와 진지왕의 장자인 용수 사이에서 잉태되어 태어났으므로 선덕여왕이 성골이라면 그 언니의 아들인 김춘추도 성골이어야 하는데, 김춘추를 진골이라 하기 때문에 그 분류기준이 모호하다고 하는 것이다.

 

☆ 일반적으로 우리는 신라왕들의 골품에 대하여 부모가 모두 왕족이면 성골, 한쪽 편이 왕족이 아니면 진골일 것이라고 하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신라에는 옛날 고조선때부터 전해 내려온 종파가 있어 태백산을 숭배하는 산신파와 동해의 용을 숭배하는 용신파가 있어 태백산을 숭배하는 파를 성골이라 하고, 용을 숭배하는 파를 진골이라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성골인 선덕여왕은 자신이 죽거든 양산 남쪽 도리천에 묻어달라고 하였고, 진골인 문무왕은 죽어 용이 되고자 동해바다에 장사지내 달라고 하였던 것이다.

    
 선덕여왕의 치적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른 때는 신라가 죽령 서북쪽 500리 땅을 차지하고 있을 때로서 신라는 그 땅을 지키기 위하여 선덕여왕 재위 기간 내내 고구려와 백제를 상대로 끝없는 전쟁을 벌여야 했다.
  그리하여 신라는 당나라와의 유대를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선덕여왕은 왕위에 오르자 먼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하게 되고, 당나라에서는 진평왕에 이어 선덕여왕에게도 "주국 낙랑군공 신라왕"이란 작위를 보내오게 되는데, 신라 최초로 작위를 받은 때는 서기 566년 진흥왕 26년으로서 진흥왕은 북제로부터 "사지절 동이교위 낙랑군공 신라왕"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이는 북제가 신라왕이 낙랑군 땅의 주인이라는 것을 국제적으로 인정한다는 말로서 이때부터 신라가 옛 후한낙랑군 땅으로 진출하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선덕여왕은 백성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모든 주군의 1년 세금을 면제시켜 주는 조치를 취하게 되고,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고쳐 반포한다.
  신라가 연호를 처음 반포한 때는 536년 법흥왕 23년으로서 건원(建元)이었고, 진흥왕 때는 개국(開國), 대창(大昌), 홍제(鴻濟)라는 연호를 사용했고, 진평왕 때의 연호는 건복(建福)이었으며, 선덕여왕 때의 연호는 인평(仁平), 진덕여왕 때의 연호는 태화(太和)였으나 진덕여왕은 후일 그 연호를 버리고 중국 연호인 영휘(永徽)를 사용하게 됨으로써 자율성을 잃고 스스로 당나라의 영향력 속으로 들어가고 만다. 그런데 선덕여왕 때 연호를 인평이라 했다는 것은 선덕여왕의 통치이념이 어진 마음으로 나라를 다스리겠다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라가 이때에 이르러 연호를 반포했다는 것은 신라의 왕들이 법흥왕 때부터 선덕여왕 때까지 황제를 칭했다는 말이 되므로 선덕여왕 역시 황제를 칭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나라 사람들이 덕만(선덕여왕의 이름)을 왕위에 올려 세우고 칭호를 올려 "성조황고(聖祖皇姑)"라고 했다는 것은 선덕여왕이 왕이 아니라 "황제"였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기록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선덕여왕은 "선덕여황제(善德女皇帝)"라고 불러야 옳을 것이고, 법흥왕, 진흥왕, 진평왕 역시 황제로 고쳐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그리고 선덕여왕은 귀족자제들을 당나라의 국학(國學)에 입학시켜 학문 발전을 꾀하고, 첨성대를 지어 천문관측을 하게 하고, 절과 탑을 지어 불교진흥에도 힘쓰게 된다.
  분황사는 선덕여왕 재위 3년인 634년에 준공된 것이고, 황룡사 9층탑은 중국에 유학을 갔다가 643년 3월에 돌아온 자장의 건의에 따라 645년 3월에 세운 것이다.
  자장은 이때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들이 항복해 올 것이고, 구한이 와서 조공을 바칠 것이며, 왕업이 길이 편안할 것이라고 했는데, 그 탑의 영험이 정말로 있었는지 결과적으로 이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황룡사 9층탑을 다시 세우면 혹시 이웃나라가 모두 항복해 오지 않을까?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선덕여왕의 가장 큰 업적은 후일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활동하게 되는 김유신과 김춘추를 얻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선덕여왕 시절에는 재위기간 내내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는데, 그것은 선덕여왕이 그 아버지 진평왕으로부터 매우 넓어진 강역을 물려받았기 때문이었다.
  앞서 서기 313년에 이르러 고구려 미천왕은 평양성 남쪽에 위치하고 있던 후한낙랑군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고구려 땅으로 만들고, 314년에는 대방군 마저 없애버린다. 그런데 371년에 백제의 근초고왕이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죽이고, 승전하게 되어 옛 후한낙랑군 땅은 다시 백제의 소유가 된다.
  그러자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침공하여 아신왕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그 땅을 되찾아가게 되고, 장수왕이 동황성에서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자 신라와 백제는 나제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침공에 대항하게 되는데, 장수왕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번 백제의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잡아죽이게 되어 옛 후한낙랑군 땅은 영원히 고구려의 소유가 되는 듯 했다.
  그런데 진흥왕 11년인 550년에 이르러 백제와 고구려가 도살성과 금현성을 놓고 공방전을 펼치다가 두 나라 군사가 모두 지치게 되자 신라가 그 틈을 이용하여 두 성을 모두 차지해 버리게 되어 나제동맹이 깨어지게 된다.
  그리하여 삼국은 옛 후한낙랑군 땅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각축전을 펼치게 되는데, 신라는 진흥왕 16년(A.D.555)에 북한산까지 강역을 넓혔고, 612년에 수 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하여 고구려가 수나라와의 전쟁에 몰두하고 있는 사이를 틈타 죽령을 넘어 들어가 그 서북쪽 500리 땅을 차지하게 되어 옛 맥국의 땅은 다시 신라의 소유가 되는데, 이때가 선덕여왕의 아버지인 진평왕 때였다.
  따라서 선덕여왕은 삼국의 쟁탈지 옛 맥국 땅을 물려받음으로 해서 재위기간 내내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으로 수많은 전쟁을 치루어야 했다. 
  선덕여왕 재위 시의 유명한 전투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 지역에 위치했던 대야성전투인데, 이때 백제의 침공을 받고 대야성이 함락되어 도독인 김품석과 그의 아내이며 김춘추의 장녀인 고타소가 잡혀 목이 잘려 죽게 된다.
  그러자 김춘추는 그때부터 복수의 화신이 되어 딸 고타소의 원수를 갚기 위해 고구려로, 왜국으로, 당나라로 가서 백제를 치기 위한 청병외교를 펼치게 되고, 결국 당나라를 끌어들여 서기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키고야 만다.
  백제는 이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김춘추의 딸을 죽임으로써 더 빨리 멸망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선덕여왕의 죽음

 

                                                    [한반도 경주의 가짜 선덕여왕릉]

 

                [선덕여왕릉이 조성된 진짜 낭산 : 이 낭산의 남쪽에 선덕여왕릉이 조성되었을 것이다]

 

  선덕여왕은 645년(646년일 가능성도 있다) 11월에 이찬 비담을 상대등으로 임명했는데, 바로 이 비담이 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 하여 647년 1월에 반역을 일으켰으나 이를 제압하고 나서 바로 죽게 되는데, 자신이 전에 죽을 날이라고 예언했던 바로 그 날이었기 때문에 신라의 대신들이 선덕여왕의 예지력에 대하여 놀랐다고 한다. 
  혹자는 선덕여왕의 죽음을 비담의 난과 연결시켜 선덕여왕이 비담의 난 때 시해당해 죽었을 것이라고 하기도 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때 선덕여왕은 이미 환갑 쯤의 나이였기 때문에 늙어 병들어 죽은 것이고, 유언에 따라 낭산 남쪽에 장사지냈는데, 이때만 해도 선덕여왕이 왜 그곳을 도리천이라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후일 문무왕이 선덕여왕의 능 아래에 사천왕사를 짓게 된다.
  비록 인위적이기는 하지만 사천왕사의 위쪽에 선덕여왕의 능이 위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불경에는 사천왕천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다.
  그리하여 신하들은 선덕여왕이 왜 자신의 능 자리를 도리천이라 했는지 그제서야 깨닫고 그녀의 예지력에 대하여 또 한번 감탄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