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고구려 900년설과 700년설의 진실 - 최초주장
고구려가 건국된 지 705년 만에 멸망했다고 하는 것이 "고구려 700년설"이고, 900년 만에 멸망했다고 하는 것이 "고구려 900년설"이다.
고구려 700년설은 삼국사기에 고구려가 기원전 37년에 건국되어 서기 668년에 멸망함으로써 705년간 존속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대두된 설이고,
고구려 900년설은 신당서 고구려전에 시어사 가언충이 당 고종에게 보고하는 말 중에 "고구려가 한(漢)나라 때부터 나라가 있어 지금 900년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대두된 설이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조에는 또 고구려가 멸망한 후 문무왕이 신라로 망명해 온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삼는 책명문에 "공의 태조 중모왕은 덕을 북쪽 산에 쌓고 공을 남쪽 바다에 세워 위풍이 청구에 떨쳤고 어진 교화가 현토를 덮었었다. 자손이 서로 이어 줄기와 가지가 끊어지지 아니하였고, 개척한 땅은 천리나 되어 거의 800년이나 내려오더니 남건과 남산 형제 때에 이르러 화가 집안에서 일어나고 틈이 골육간에 생겨 집과 나라가 부수어져 망하고 종묘와 사직이 멸망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 기록에 따라 고구려 800년존속설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해를 한나라 효원제 건소2년(B.C.37)으로 기록하고 있고, 멸망한 해를 보장왕27년 당 총장 원년 무진년(A.D.668)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고구려가 건국된 지 705년만에 멸망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신당서 고구려전을 보면,
"시어사 가언충이 전선의 상황을 알아보고 요동에서 돌아왔다. 고종이 전선의 상황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이번 전쟁은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지난날 선제(당 태종)께서 (고구려의) 죄를 물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오랑캐에게 빈틈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속담에 '전쟁에는 동조하는 자가 없으면 도중에 회군해야 한다'고 했는데, 오늘날에는 남생의 형제가 집안 싸움으로 인하여 우리를 인도하여 주고 있으니 우리가 오랑캐의 내부 사정을 훤히 알 수 있으며, 장수들은 충성을 다하고 군사들은 온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고구려의 비기에 '(고구려는 건국된 지) '900년이 될 때에 80살 먹은 대장에게 멸망한다'고 되어 있는데, 고씨가 한(漢)나라 때로부터 나라가 있어 지금 900년이 되었고, 이적의 나이가 또 80세입니다. 고구려는 기근이 거듭되어 사람들은 서로 약탈하여 팔고, 지진으로 땅이 갈라지며, 이리와 여우가 성안으로 들어가고 두더지가 성문에 굴을 뚫어 인심이 불안에 떨고 있으므로 이번 걸음을 끝으로 또 다시 출전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가언충은 다른 사람도 아닌 황제(당 고종)에게 서기 668년에 고구려가 건국된 지 900년이 되었다고 태연스럽게 보고하고 있는 것이다.
황제에게 허위보고를 했다가는 목이 달아나거나 최소한 귀양을 가게 되는 일인데도 가언충은 그렇게 말하고 있고, 당 고종도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를 보면 중국 사람들은 서기 668년에 고구려가 건국된 지 900년이 되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서기 668년이 고구려가 건국된 지 900년이 되는 해라면 역산해보면 이는 고구려가 기원전 232년에 건국되었어야 한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조의 사론을 보면, "고구려는 진(秦)·한(漢) 이후 중국 동북방에 끼어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가 기원전 37년이 아닌 기원전 232년에 건국되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역사는 또 한번 요동치게 된다.
그런데 이 기록의 비밀을 풀 수 있는 단서가 엉뚱하게도 우리가 지금까지 위서라고 치부해 버린 환단고기(桓檀古記)에 들어 있다.
환단고기 북부여기를 보면, 해모수가 기원전 239년에 북부여를 건국했다 하고, 기원전 232년에 이르러 오가의 추대를 받아 단군(천제)의 자리에 오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 호태왕 비문을 보면, 추모왕의 출자에 대하여 "북부여 천제의 자손(北夫餘 天帝之子)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딸(母河伯女郞)"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북부여의 건국시조인 해모수를 "천제(天帝)"로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를 보면,
"고구려의 선조는 해모수로부터인데 해모수 어머니의 고향 역시 그곳이다. 조대기에 이르기를 '해모수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일찍이 웅심산에서 살다가 부여의 옛 서울에서 군사를 일으켜 무리에게 추대되어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니 이를 부여의 시조라 한다........(중략)..........고리군의 왕 고진(해진의 오기)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며, 옥저후 불리지는 해진의 손자이다. 모두 도적 위만을 토벌함에 공을 세워 봉함을 받았다. 불리지는 일찍이 압록강 서쪽을 지나다가 하백의 딸 유화를 만나 즐겨 주몽을 낳게 하였는데, 이때가 임인 5월 5일이었다. 곧 한나라왕 불능의 원봉2년(B.C.79)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 주몽의 아버지가 해모수의 증손자 해불리지라는 것을 밝힌 기록은 이 기록이 유일한데, 삼국사기 고구려 건국설화에 유화가 말하기를 "웬 사나이가 자칭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면서 나를 웅심산 아래 압록강 가에 있는 집안으로 유인하여 정을 통하고는 돌아오지 않았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 해불리지가 유화를 강제로 겁탈하고 돌아간 후 소식이 없었다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이때 해모수의 증손자인 해불리지가 자신을 해모수라고 말했을 리는 없고, 자신을 천제 해모수의 후손이라고 밝혔을 것인데, 삼국사기에는 해불리지가 해모수의 후손이라는 말이 없이 해모수가 주몽의 아버지라고 잘못 기록되어 있다.
이후 주몽의 아버지인 해불리지가 죽자 어머니인 유화가 주몽을 데리고 가섭원(동부여)으로 옮겨가서 살다가 주몽이 동부여 왕궁의 말지기가 되었으나 관가의 미움을 받아 친구들인 오이, 마리, 협보와 함께 동부여에서 도망쳐 졸본부여로 갔고, 그곳에서 주몽이 아들없이 딸만 있던 졸본부여 왕의 사위가 되었다가 왕이 죽자 그 졸본부여의 왕위를 물려받았는데, 이를 고구려의 시조라한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 주몽이 관가의 미움을 받아 동부여에서 급히 도망쳐야 했다면 이때 동부여에 정치적으로 아주 중요한 사건이 있었고, 주몽이 이에 깊이 연루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마 사생아로서 해부루왕의 양아들이 되어 있던 금와를 제거하려다가 실패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하여 잡히면 죽게되는 아주 급박한 상황이 되자 주몽은 어머니인 유화와 임신한 부인 예씨를 동부여에 그대로 남겨둔 채 급히 동부여에서 도망쳐 졸본부여로 가게 되었고, 또 그 아들인 유리 역시 후일 그 어머니 예씨와 함께 동부여에서 도망쳐 졸본으로 주몽왕(추모왕)을 찾아오는 것으로 보아 이는 틀림없을 것이다.
이를 잘 새겨보면, 고구려 900년존속설과 700년존속설을 확실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즉 고구려 900년존속설은 고구려의 존속년도를 해모수가 북부여를 건국하고 천제의 자리에 오른 기원전 232년부터 고구려가 멸망한 서기 668년까지를 모두 고구려의 존속기간으로 보는 시각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고구려 700년존속설은 해모수의 고손자인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기원전 37년부터 멸망한 서기 668년까지 만을 고구려의 존속기간으로 보는 시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고구려의 존속기간을 어떻게 보는 것이 옳은 것일까?
삼국사기 연표를 보면 그 서두에, "해동에 나라가 있은 지 오래였다. 기자가 주나라 왕실에서 봉작을 받고, 위만이 한나라 초엽에 왕호를 참칭한 뒤로부터 연대가 요원하고 기록들이 조잡하여 도저히 그 사적을 자세히 알 수가 없고, 3국이 솥발처럼 대치함에 이르러서는 나라들이 더욱 많아졌으나 신라는 56왕에 992년이오, 고구려는 28왕에 705년이오, 백제는 31왕에 678년이었다. 그 시초와 종말은 상고할 수 있으므로 3국의 연표를 작성한다.
[당나라 가언충이 고구려는 한나라 때로부터 나라를 가졌는데 지금 900년이다라고 한 것은 착오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사기 편찬 당시에도 고구려의 건국년대에 대하여 논란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결국 김부식 등은 900년설을 배제하고 700년설에 따라 삼국사기 연표를 작성했다.
어느 사람은 김부식이 고구려의 건국년도를 신라보다 늦게 만들기 위하여 일부러 고구려의 건국년도를 뒤로 왜곡했다고 하기도 하는데, 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북부여가 건국된 해는 기원전 239년이었고, 해모수가 천제의 자리에 오른 때는 기원전 232년이었다. 그리하여 중국 사람들에게 기원전 232년이 북부여의 건국년도로 전해졌던 듯 하다.
그리고는 왕위가 2대 해모수리로, 다시 3대 해해사로, 4대 해우루로 이어지게 되는데, 기원전 108년에 이르러 동명이라는 사람이 졸본을 근거지로 하여 졸본부여를 건국하기에 이르고, 기원전 86년에 북부여가 졸본부여에 병합되어 멸망하고 만다.
그러자 북부여 해우루왕의 동생인 해부루가 북부여 유민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도망쳐 다시 동부여를 건국하고 시조가 된다.
☆ 엄격한 의미에서 북부여는 기원전 239년부터 기원전 86년까지 4대 154년 만에 멸망했고, 졸본부여는 기원전 108년에 건국되어 기원전 37년까지 72년 만에 멸망했으며, 동부여는 기원전 86년에 건국되어 서기 494년까지 580년 만에 멸망했다.
그런데 북부여 천제 해모수의 둘째 아들 해진의 후예인 주몽이 기원전 79년에 동부여에서 태어나 자란 후 어떠한 일에 연루되어 잡히면 죽을 상황이 되자 졸본부여로 도망쳐 졸본부여 왕의 부마가 되었다가 그 왕위를 물려받아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이때가 주몽의 나이 22세 때인 기원전 58년 10월이었다.
이때의 주몽은 엄격한 의미에서는 졸본부여의 왕이지 고구려의 왕이 아니었다.
☆ 삼국사기에는 주몽이 기원전 58년에 태어나 22세 때인 기원전 37년에 고구려를 건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기원전 58년은 주몽의 아들 유리가 태어난 해이고, 주몽이 졸본부여의 왕위에 오른 해이다.
그런데 주몽은 기원전 37년에 이르러 다시 고구려를 건국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말은 졸본부여의 왕위에 올라 있던 주몽이 졸본부여의 국호를 고구려로 바꾸었다는 말이 된다. 즉 주몽은 기원전 37년에 이르러 동명왕이 세운 졸본부여를 없애버리고 해모수의 후손이 세운 새로운 나라인 고구려를 건국했던 것이다.
☆ 후세의 기록들을 보면 고구려는 북부여 천제 해모수의 후예임을 천명하고 있고,
백제는 졸본부여 동명왕의 후예임을 알 수 있는데, 이는 해모수와 동명이 전혀 혈통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해모수의 후예인 고구려왕실은 주몽의 친손인 해씨와 주몽의 외손인 고씨를 왕의 성씨로 삼았고,
동명왕의 후예인 백제는 부여씨를 성씨로 삼고 있는 것이 그 증거라 할 수 있을 것인데, 백제는 원래 고조선 단군왕검의 넷째 아들인 부여의 먼 후예라 보여진다.
따라서 주몽을 동명성왕이라 기록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잘못된 것으로서 고구려의 건국시조 주몽은 호태왕 비문의 기록에 따라 추모왕이라 해야 옳고, 성씨도 해(解)씨라 해야 옳을 것이다.
따라서 김부식 등이 고구려 700년 존속설에 따라 삼국사기를 지은 것은 고구려가 북부여 천제 해모수의 후예인 것은 틀림없지만 기원전 86년에 이르러 그 북부여가 졸본부여에게 멸망함으로써 북부여의 국통이 무려 50년간 단절되었다가 기원전 37년에 이르러 해모수의 고손자인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했다고 하더라도 고구려가 북부여를 직접 이은 나라라고 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漢)나라의 경우에도 우리는 지금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으로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는데, 이는 중간에 왕망에 의해 전한의 왕통이 겨우 18년간 단절되었다가 후한 광무제에 의해 다시 한나라가 복원되었지만 우리는 광무제가 복원한 한나라를 후한이라 분리해서 보는 시각과 같고, 우리 역사에 온조왕의 백제와 견훤의 후백제가 있었지만 이 두 나라를 하나의 나라로 보지 않는 것과 같으며, 왕건의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천명하고 있으나 고구려와 고려를 같은 나라로 볼 수 없는 것과 같을 것이다.
따라서 김부식과 고려 학자들의 역사관이 틀렸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김부식은 신라의 역사를 길게 만들려고 고구려의 역사를 일부러 잘라버렸던 것이 아니라 사실은 북부여의 역사와 고구려의 역사를 별개로 보았던 것이다.
다만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삼국사기 어느 한 쪽이라도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인 북부여와 졸본부여, 동부여의 역사를 좀더 세밀하게 기록해 전해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