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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신라 법흥왕에게 시집간 백제 동성왕의 딸 보과공주 - 최초주장

윤여동 2009. 6. 25. 20:02

 

윤여동설 - 신라 법흥왕에게 시집간 백제 동성왕의 딸 보과공주 - 최초주장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4년(A.D.553) 계유년 조를 보면, “겨울 10월에 왕이 백제 왕녀에게 장가들어 작은 왕비로 삼았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백제본기 성왕 31년(A.D.553) 조에도, “겨울 10월 왕의 딸이 신라에 시집을 갔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기록대로라면 이때 백제 성왕의 딸이 신라 진흥왕에게 시집갔다고 하는 셈인데,

  사실 이때는 역사적으로 나제동맹이 깨어져 신라와 백제의 관계가 매우 악화되어 있을 때였으므로 어떻게 그러한 정치적인 상황과는 상관없이 백제의 성왕이 딸을 신라 진흥왕에게 시집보낼 수 있었는지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화랑세기 필사본에 의하여 신라로 시집간 백제공주가 26대 성왕의 딸이 아니라 24대 동성왕의 딸 보과공주였음이 밝혀졌다.

  따라서 이는 삼국사기에 서기 493년 계유년 조에 기록되었어야 할 기록이 착각으로  60년 후인 553년 계유년 조에 잘못 기록되어 지금까지 우리를 혼란스럽게 했다고 할 수 있다.

 

☆ 서기 493년 계유년은 신라 21대 소지마립간 15년이었고, 백제 동성왕 15년이었으며, 고구려 문자왕 2년에 해당하는 해이다.

 

  백제 동성왕은 479년에 왕위에 오르자 남제와의 관계를 강화하고, 가까운 신라와도 화친을 도모한다. 북위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동성왕이 493년 3월에 이르러 신라에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자 신라에서 이찬 비지의 딸을 보내오게 되고, 동성왕은 자신의 딸을 국공인 김원종(후일의 법흥왕)에게 시집 보내게 된다.     

  그리하여 백제와 신라 두 나라는 국혼으로 맺어진 친밀한 사이가 되어, 494년에 고구려와 신라가 살수벌판에서 교전하여 신라가 이기지 못하고 견아성으로 퇴각하여 방어하는 상황이 되고, 고구려가 그 견아성을 포위하여 잘못하면 신라군이 전멸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자 동성왕은 군사 3천을 보내 그 포위를 풀어주게 되고, 또 495년에 고구려가 백제를 침공하여 치양성을 포위하자 백제에서 신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자 신라에서도 장군 덕지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가서 구원하게 하는 등 두 나라는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보과공주는 백제 24대 동성왕의 딸이다.

  그런데 그녀는 백제에서 몰래 도망하여 신라로 가서 당시 국공이었던 후일의 법흥왕과 혼인하였다.

  신라 23대 법흥왕은 지증왕의 손자로서 이름은 원종이었다.  

  지증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지증은 소지왕의 부군이었고, 원종은 국공이었다.

  부군이란 차기 왕위에 오를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서 태자에 해당했고, 국공은 차차기에 왕위에 오를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

 

☆ 양서 신라전에는 보통 2년(A.D.521)에 “성은 모(募), 이름이 진(秦)인 왕이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했는데, 백제를 따라와 토산물을 바쳤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남사 신라전에는 “보통 2년에 성은 모(募), 이름이 태(泰)인 왕이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백제를 따라와 토산물을 바쳤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521년은 신라 법흥왕 8년에 해당하는 해로서 법흥왕의 이름은 김원종인데 어떻게 모진 또는 모태라고 기록되어 있는지 아직까지도 그 비밀을 풀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법흥왕이 국공 시절(490년경)에 백제에 사신으로 간 일이 있었다.

  이때 백제는 24대 동성왕 때로서 통일된 백제의 힘을 모아 서안평과 요서지역을 북위와 고구려로부터 빼앗아 강역이 백제 역사상 가장 넓었던 때였다.

  이때 동성왕에게는 보과라는 딸이 있었는데, 신라에서 사신으로 온 김원종(후일의 법흥왕)을 보자 첫눈에 홀딱 반해 버렸다.

  보과는  얼굴이 매우 예뻤고 성격 역시 활달했다.

  그리하여 보과는 원종에게  

  “국공님 나는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라고 사랑을 먼저 고백했다. 

  원종 역시 호방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둘은 사랑을 나누게 되었고, 얼마 후 원종은 신라로 돌아가게 되었다.

  신라로 돌아가면서 원종이 보과에게 말하기를,

  “내가 신라로 돌아가서 상의하여 정식으로 청혼토록 하겠오. 조금만 참고 기다리시오” 하였다.

  그러나 백제에 홀로 남겨진 보과는 원종이 떠나자 보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어머니인 왕비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지금이라도 원종을 뒤 따라 가겠다고 했으나, 그 어머니인 동성왕비는 일국의 공주가 진득하니 기다릴 일이지 왜 이렇게 경망스럽게 행동하느냐고 핀잔만 주었다. 

  님은 보고 싶은데 그 님은 하루하루 백제에서 멀어져만 가고 있었다.

  보과는 안타까움에 자신의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보과공주는 어느 날 밤 어머니에게 신라로 간다는 편지를 한통 써서 남기고 백제의 궁중을 홀로 빠져나와 무조건 원종을 따라갔으나 중간에서 원종을 따라잡지는 못하고 신라까지 따라가게 되었다.

  국경에 이르러 살펴보니 병사들의 검문이 아주 심했다.

  보과는 자신을 잡기 위하여 엄명이 내려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보과는 지금의 복장으로는 국경초소를 통과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주변 민가로 들어가 자신의 비단 옷을 벗어주고 허름한 무명옷으로 바꿔 입었다.

  그리고 얼굴에도 검은 칠을 하고 머리는 풀어헤치고 미친 여자같이 변장을 하고서 간신히 국경을 통과하였다.

  

  보과는 결국 그런 옷차림으로 신라의 도읍 금성까지 가게 되었고, 궁궐로 가서 국공을 찾았다.

  수문장이 보과의 옷차림을 훑어보더니 웬 정신 나간 여자인가 싶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보과는 편지를 써서 국공에게 전해주기를 부탁하면서 자신의 옥가락지를 수문장에게 주었다.  

 

  한참이 지나서 원종이 직접 대궐 문까지 나왔다.

  백제에 있어야할 보과를 보더니 원종이 깜짝 놀라며,

  “무슨 일이 있었소? 그리고 이 행색은 어찌된 것이요?”하고 물었다.

  보과는 “국공께서 백제를 떠나자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어 왕의 허락도 받지 않고 몰래 신라로 왔습니다. 오는 길에 국경을 통과하기 위하여 변복을 하고 미친 여자행세를 하느라 행색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이제 나는 백제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만약 백제로 돌아가라고 하신다면 저는 강물에 몸을 던져 죽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 당장 혼인식을 올리자고 졸랐다.

  원종은 성격 급한 보과를 보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신라의 궁중에 퍼져 사람들이 백제공주 보과를 보기 위하여 모여들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신라에서는 다시 사신을 백제에 보내 청혼을 했고, 동성왕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여 10월에 이르러 혼인을 승낙했다.

 

  보과는 법흥왕과의 사이에서 남모라는 딸과 모랑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삼국유사 탑상 제4 미륵선화 조에 언급되고 있는, 두 원화 중 교정의 질투로 죽게 된 남모가 바로 이 백제 보과공주의 딸이며, 아들 모랑은 화랑의 3세 풍월주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