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신라왕자 김수충은 33대 성덕왕의 장자가 아니라 32대 효소왕의 유복자였다 - 최초주장
우리 역사에서 기록은 전해지고 있으나 명쾌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 조에 나타나는 신라왕자 김수충과 성정왕후의 신분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33대 성덕왕 3년(A.D.704) 조를 보면,
"여름 5월에 승부령 소판 김원태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15년(A.D.716) 조를 보면,
"성정(엄정이라고도 한다)왕후를 궁에서 내 보내는데, 비단 5백 필, 밭 2백 결, 벼 1만석, 저택 한 구역을 주었는데, 집은 강신공의 집을 사서 주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사람들은 이 기록을 보고는 성정왕후가 성덕왕의 첫 부인이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무언가 잘못이 있어 궁중에서 폐출되었을 것이라고 역사를 해석한다.
필자 주 : 삼국사기에는 성정왕후를 "엄정이라고도 한다"고 주를 달아 놓았는데, 이는 김부식이 성정왕후와 엄정왕후를 헷갈렸기 때문일 것이다.
성정왕후는 효소왕의 왕후였고, 엄정왕후는 성덕왕의 첫 왕후였던 김원태의 딸이었다.
삼국유사 왕력 33대 성덕왕 조를 보면, "이름은 흥광인데 본래의 이름은 융기였다. 효소왕의 아우이고, 처음 왕비는 배소왕후로 시호는 엄정이며, 대원(원태의 오기인 듯) 아간의 딸이다. 다음 비는 점물왕후로 시호는 소덕이며, 순원각간의 딸이다.
임인년에 즉위하였고, 치세는 35년간이며,능은 동촌 남쪽에 있는데, 양장곡이라고도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필자의 주장을 확인해 주고 있다.
그런데 성정왕후가 잘못을 저지르고 궁중에서 쫓겨나야 했다면 목숨 부지하고 살아나가는 것만도 감지덕지할 판인데, 그 많은 물품과 재산을 주어 내보내는 것이 매우 이상한 것이다.
그런데 이 기록 속에는 우리가 지금까지 밝히지 못했던 비밀이 들어 있었다.
☆ 삼국사기의 주에서 성정왕후를 엄정왕후라고도 한다는 것은 오기이다.
삼국유사 왕력편을 보면, 성덕왕의 처음 비는 배소왕후로 시호는 엄정이며 원대아간의 딸이고, 다음 비는 점물왕후로 시호는 소덕이며 순원각간의 딸이라 기록되어 있을 뿐 성정왕후에 대해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성덕왕은 702년에 그의 동복 형 효소왕이 젊은 나이로 죽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 “성덕왕은 신문왕의 둘째 아들이요 효소왕의 동복동생이다. 효소왕이 죽고 아들이 없으매 백성들이 그를 왕으로 세웠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있어 지금까지 김수충을 성덕왕의 장자로 보았으나 김수충이 효소왕의 유복자라면 해석을 전혀 달리 할 수 있게 되고, 또 효성왕을 성덕왕의 둘째 아들이라 기록한 삼국사기의 기록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수충이 정말로 성덕왕의 장자였다면 효성왕은 수충, 중경에 이어 셋째아들이라 기록했어야 하는데, 둘째아들이라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죽은 성덕왕의 장자 중경에 이어 효성왕이 실제 성덕왕의 둘째아들이었기 때문에 삼국사기에 이러한 기록이 남겨지게 되었던 것이지 일부 학자의 주장처럼 김수충을 제외하게 되어 이렇게 기록했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704년 5월에 이르러 승부령 소판 김원태의 딸(엄정왕후)을 첫 왕비로 맞아들여 아들 중경을 낳았고, 714년에는 왕자 김수충을 당나라에 숙위 보냈다는 기록이 이어지고, 715년에 중경을 태자로 삼았고, 716년에 성정왕후를 궁에서 내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717년 6월에 태자 중경이 요절해 버리자, 9월에 당나라에 가 있던 왕자 수충이 귀국했다는 기록이 이어지고, 720년에 이르러서는 성덕왕이 다시 이찬 순원의 딸(소덕왕후)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는 것으로 보아 이때쯤 첫 왕비였던 엄정왕후도 죽게 되어 새 왕비를 맞아들였다고 보여진다.
그리고는 724년에 이르러 소덕왕후의 소생으로서 겨우 3-4세 정도에 지나지 않았을 승경을 태자로 삼았다는 기록이 이어진다.
그런데 성정왕후가 실제 성덕왕의 첫 왕비였고 이때에 이르러 무언가 큰 잘못이 있어 폐출 당했다면 죄인으로서 서민으로 강등시켜 빈 몸으로 내 쫓았을 텐데, 성덕왕은 큰집과 밭 200결과 벼 1만석, 비단 500필 등 궁 밖에 나와서도 편히 살 수 있도록 조치한 후 궁에서 내보내고 있으니 매우 이상한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까지도 성덕왕과 성정왕후 그리고 김수충과의 관계를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이는 그리 혼란스러워 할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성정왕후는 성덕왕의 첫 왕비가 아니라, 사실은 성덕왕의 동복형이었던 효소왕의 왕비였고, 김수충은 효소왕의 유복자였기 때문이다.
효소왕이 702년 7월에 죽었을 때, 왕비는 성정왕후였고, 그녀는 임신 중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효소왕이 죽었을 당시에는 효소왕의 아들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다음 왕위는 효소왕의 동복동생인 흥광(성덕왕)이 오르게 되었고, 702년 말 또는 703년 초에 효소왕의 유복자인 김수충이 태어나게 된다.
☆ 중국 안휘성 구화산 화성사의 등신불 김교각 스님이 김수충일 것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김교각 스님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아들인 김문주로 밝혀졌다.
효소왕비인 성정왕후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낳은 수충이 성장하면 당연히 태자로 봉했다가 성덕왕 다음 왕위는 효소왕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신의 아들이 왕위에 올라야 한다고 생각하며, 궁중 안에 15년이나 버티고 살며 아들 수충을 키우게 되고, 성덕왕도 아들 중경을 낳아 성장하게 된다.
그런데 714년에 이르러 성덕왕은 왕위를 자신의 아들로 잇게 하고 싶었던지 걸림돌인 장조카 수충을 당나라에 숙위로 보낸 후 그 다음 해인 715년 12월에 전격적으로 자신의 장자인 중경을 태자로 봉해버린다.
이때 효소왕비 성정왕후는 크게 반발했을 것이지만 대세에 밀려 더 이상 궁 안에 머무를 명분을 잃게 되어 어쩔 수 없이 716년 3월에 궁 밖으로 나와 살게 되었다고 보여지는데, 이때 성덕왕은 형수인 성정왕후에게 그래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지 재물을 충분히 주어 궁에서 내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성정왕후에게 자신의 아들 수충을 태자로 봉할 또 한번의 기회가 찾아오게 되는데, 이는 태자로 봉해졌던 성덕왕의 장자 중경이 717년 6월에 갑자기 죽어버렸기 때문인데, 이때 성덕왕의 아들로는 오직 중경하나 밖에는 없었기 때문에 다음 왕위를 이을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자 성정왕후는 당나라 장안(지금의 서안)으로 급히 사람을 보내 수충을 귀국하도록 하는데, 717년 9월에 이르러 수충이 공자와 그의 제자들의 초상을 가지고 돌아와 숙부인 성덕왕에게 바치자 대학에 비치하도록 명한다.
그러나 성덕왕은 이때에도 효소왕의 유복자로서 자신의 장조카인 수충을 태자로 봉하는 것을 거부하고 태자의 자리를 비워 두었다가 720년 3월에 새로이 소덕왕비를 맞아들여 아들 승경을 낳은 후 724년 봄에 이르러 아직 어린애에 지나지 않는 승경을 태자로 봉하게 된다.
그런데 성덕왕이 장조카인 수충을 태자로 봉하는 것을 끝까지 거부했던 것이 다음 왕위를 놓고 수충의 어머니인 성정왕후와의 관계가 매우 악화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많은데, 어찌되었든 실제 김수충이 효소왕의 유복자 임이 확실하다면 성덕왕은 다음 왕위를 장조카인 김수충에게 돌려주는 것이 인간적이고 바른 길이었다고 보여지는데, 결과적으로 성덕왕의 뒤를 이어 성덕왕의 둘째 아들인 효성왕 승경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후 성정왕후와 김수충에 대한 기록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그 이유도 나타나지 않는데, 김수충이 실제 효소왕의 아들이었다면 김수충은 왕위를 도둑질 당한 것이 되고, 효소왕비 성정왕후는 시동생인 성덕왕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말로 해석이 가능해 지는 것이다.
성정왕후는 33대 성덕왕의 첫 왕비가 아니라 사실은 32대 효소왕비였고 김수충은 효소왕의 유복자였던 것이다.
왕위를 빼앗긴 비운의 왕자 김수충은 그 후 어디서 어떻게 살다 죽은 것일까?
그리고 그의 후손들은 지금 자신들이 효소왕의 먼 후손인 것이나 알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