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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선덕여왕과 김유신은 정말 서로 사랑했을까?

윤여동 2009. 7. 9. 19:56

윤여동설 - 선덕여왕과 김유신은 정말 서로 사랑했을까?

 


  드라마 선덕여왕을 보면, 덕만공주(후일의 선덕여왕)와 김유신과의 관계를 서로 연모하는 사이로 그리고 있고, 김유신의 나이가 선덕여왕보다 많은 것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그것이 사실일까?

  김유신은 서기 595년에 태어났고, 김춘추는 서기 603년에 태어났다.

  김유신이 김춘추보다 여덟 살이 위다.

  그런데 김춘추는 선덕여왕의 언니인 천명공주와 진지왕의 장남인 용수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즉 김춘추는 선덕여왕의 조카인 것이다.

  천명공주가 18세쯤 춘추를 낳았다면 천명공주는 586년에 태어났다는 말이 되는데, 이때는 진평왕 8년에 해당하는 해로서 이때 진평왕의 나이 20세였고, 진평왕은 재위 54년인 632년 1월에 죽었다. 따라서 진평왕의 뒤를 이어 덕만공주선덕여왕)가 왕위에 오를 때 그녀의 나이는 50세 가까운 나이였다.

  드라마 상에서는 천명공주와 덕만공주가 쌍둥이로 그려지고 있는데, 그를 확실하게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드라마에 따라 천명공주와 덕만공주가 쌍둥이였다고 보면, 덕만공주 역시 서기 586년경 태어났다는 말이 되는데, 김유신은 595년생이다.

  김유신이 덕만공주(후일의 선덕여왕)보다 무려 아홉 살이나 아래였던 것이다.

  따라서 드라마 상에서 김유신이 덕만공주보다 나이가 더 많다는 설정은 잘못된 것이고, 김유신이 아홉 살이나 나이가 많고, 성골인 덕만공주에게 연정을 품었을 리도 없을 것이다. 

 

  

   기록을 보면 김유신의 조상들은 신라에서 어느 정도 대우를 받기는 했으나 가야 출신이었기 때문에 상당기간 신라 왕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던 듯하다.

  이는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이 진평왕의 여동생인 만명과 연애를 하자 그들 사이를 떼어 놓으려고 만명을 광속에 가두었으나 만명이 탈출하여 김서현의 임지인 만노군으로 도망쳐 부모몰래 살림을 차리고, 김유신을 낳은 후에야 만명부인의 친정어머니인 만호부인이 외손자임을 인정하고 돌아오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그를 알 수 있다.

  김유신의 첫 부인에 관한 기록이 정사서에 나타나지 않고 있으나 김유신의 첫사랑은 엉뚱하게도 후대의 파한집에 나타나는 기녀 천관녀이다.

  김유신이 사랑할 수 있을 만큼 성장 했음에도 그때까지도 신분의 벽을 실감하고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기녀 천관녀를 사랑했으나 어머니 만명부인의 엄한 꾸지람을 듣고 정신을 가다듬어 천관녀와 헤어지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화랑세기에는 하종의 딸 영모가 김유신과 혼인한 것으로 나타나고, 보종의 딸 보라는 김춘추의 첫 부인이 되어 고타소라는 딸을 낳았다고 하는데, 하종과 보종은 모두 미실의 아들이라 하니 결국 김유신과 김춘추는 모두 미실의 손녀를 아내로 맞아들였었다는 말이 된다.


☆ 미실은 김유신과 김춘추가 어렸을 때인 서기 606년에 58세의 나이로 이미 죽었다.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김유신이 성장한 때까지 미실이 살아 있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으니 잘못된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미실이라는 이름은 단 한번도 언급되어 있지 않은데, 미실이 실존 인물이었다면 의도적으로 역사에서 지워 버렸거나 화랑세기가 소설류로서 미실이라는 인물이 실존인물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김유신의 여동생인 문희와 진지왕의 손자로서 진골로 분류되는 김춘추가 만나 연애를 하여 혼전 임신을 하였는데도 김춘추가 선뜻 김문희와 혼인을 결심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김유신이 혼전 임신한 여동생 문희를 불태워 죽인다고 소문을 내고, 덕만공주가 그 아이의 아버지가 조카인 김춘추임을 알고 빨리 가서 구해주라 하여 그 명을 받고서야 김춘추가 문희와 혼인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때 이미 혼인하여 딸(고타소) 하나를 두고 있던 김춘추가 골품 때문에 머뭇거렸던 것이 아닌가 싶은데, 이를 보면 그때까지도 가야파의 골품이 제대로 인정되고 있지 않았으나 선덕여왕 때부터 가야파의 골품이 본격적으로 인정되기 시작했다고 보여진다.

  어찌되었든 김춘추는 덕만공주의 명령임을 내세워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를 둘째 부인으로 맞아들이게 된다.  

  이때 김유신은 실권자로 떠오르는 덕만공주의 힘을 빌려 여동생 문희와 김춘추를 혼인시켰던 것이고, 이렇게 한 발자국씩 신라의 중심으로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때 김유신은 덕만공주를 이성으로서 마음에 품었던 것이 아니라 떠오르는 실권자인 덕만공주를 지지하고 그의 편에 서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김유신은 후일 진평왕이 죽자 외사촌 누나뻘인 선덕여왕을 왕위에 올렸을 것이고, 선덕여왕이 죽자 또 이어 진덕여왕도 왕위에 올려 삼국통일의 기초를 다지고, 또 매제(후일 장인도 된다)인 태종무열왕 김춘추를 왕위에 올려 백제를 멸망시키게 되고, 다시 조카인 문무왕을 왕위에 올려 고구려를 멸망시켜 삼국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김유신은 무려 네 명의 왕을 왕위에 올리고 그 위치를 튼튼히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김유신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딸이며, 자신의 조카인 지조(智照)와도 혼인을 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 태종무열왕 2년(A.D.655)조에 나타나는데, 이때 김유신은 이미 환갑쯤의 늙은 나이였고, 김유신은 673년 문무왕 13년 7월 1일에 79세의 나이로 죽게 되고, 후일 54대 경명왕 때 흥무대왕으로 추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