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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조선이 연나라 진개에게 빼앗긴 땅은 지금의 어디일까? - 최초주장

윤여동 2009. 8. 2. 11:04

윤여동설 - 고조선이 춘추전국시대 연나라의 진개에게 빼앗긴 땅은 지금의 어디일까? - 최초주장

 

 

           

   전국책 권제29 연1을 보면,

  "蘇秦將爲從 北說燕文候曰 燕東有朝鮮遼東 北有林胡樓煩 西有雲中九原 南有呼 易水 地方二千餘里 帶甲數十萬 車七百乘 騎六千疋 粟支十年 南有碣石雁門之饒 北有棗栗之利 民雖不由田作 棗栗之實 足食於民矣 此所謂天府也

(소진이 장래 합종을 하기 위해 북쪽으로 가서 연나라 문후에게 말하기를, 연나라는 동쪽으로 조선요동이 있고, 북쪽으로는 임호누번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운중구원이 있고, 남쪽으로는 호타역수가 있어 땅이 사방 2천리입니다..................)"라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연나라의 중심 강역을 가늠해 볼 수 있게 하는데, 지금의 산서성 북부와 하북성 남부에 이르는 지역이다.

 

[춘추전국시대 연나라의 위치]    

 

 

                                            임호누번

                                    

 

 

 

 

       운중구원                                                       조선요동

 

 

 

 

    

 

                                            호타역수

                                                    

                                         

  그런데 사기 권110 흉노열전 제50을 보면,

  "(춘추전국시대) 연나라의 현명한 장수 진개가 호(胡)의 인질이 되었는데 호(胡)가 그를 매우 신임했다. 돌아와 동호(東胡)를 습격하여 동호를 1천여 리(필자주 : 위략에는 2천여리라 했다) 밖으로 몰아냈다.

  형가와 더불어 진왕(진시황)을 시해하려한 진무양이라는 사람이 진개의 손자이다.

  연나라는 또 조양으로부터 양평까지 장성을 쌓고, 상곡군, 어양군, 우북평군, 요서군, 요동군을 설치하여 호를 막았다(其後燕有賢將秦開 爲質於胡 胡甚信之 歸而襲破走東胡 東胡 千餘里 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 開之孫也 燕亦築長城 自 造陽之襄平 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지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 제30 한(韓) 전의 주에는,

  "위략에 이르기를,

  옛날 기자의 후예 조선후가 있었다(昔箕子之後 朝鮮侯).

  주나라가 쇠약해지자 연나라가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동쪽을 공략하려 하였는데, 조선후 역시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주 왕실을 존속시켜주기 위하여 거꾸로 연나라를 공격하려고 하다가 그 대부인 예가 간하여 중지하고, 예로 하여금 서쪽의 연나라를 설득하니 연나라도 중지하고 공격하지 않았다.

  후에 (조선후의) 자손들이 점점 교만하고 포학해져 연나라가 드디어 장수 진개를 보내 그 서쪽을 공격하여 2천여 리(필자주 : 사기 흉노전에는 1천여리라 했다)를 빼앗고, 만반한(滿潘汗: 滿番汗이라 하기도 한다)을 경계로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이 점점 약해졌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두 기록을 비교해 보면 진개는 연나라가 강성하던 소왕(재위 B.C.311-279) 때의 사람으로 추정되고, 사기 기록 속의 동호(東胡)는 곧 조선(朝鮮:고조선)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사기 흉노전에는 1천여리라 기록되어 있고, 삼국지에서 인용한 위략에는 2천여리로 기록되어 있어 차이가 나고 있으나 어찌되었든 이때 연나라는 조선(고조선)으로부터 빼앗은 그 땅에 상곡군, 어양군, 우북평군, 요서군, 요동군의 5군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춘추전국시대 이 연5군이 설치된 지역은 원래 고조선의 강역이었다는 말이 되는데, 아직까지 이 연5군의 위치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전한서 권 28하 지리지 제8하를 보면,

 

  "상곡군(上谷郡)은 진(秦)나라가 설치했다.(필자 주 : 사실은 진나라 이전의 춘추전국시대 연나라가 최초로 설치했다. 이하 같다) 왕망은 삭조라 했는데 유주에 속했다. 36,008호이고, 인구는 117,762명이다.

  15개 현인데 저양(沮陽), 천상(泉上), 반(潘), 군도(軍都), 거용(居庸), 구무(구무), 이여(夷輿), 녕(寧), 창평(昌平), 광녕(廣寧), 탁록(涿鹿), 저거(저居), 여(茹), 여기(女祁), 하락(下落)이다.”  

 

 “어양군(漁陽郡)은 진(秦)나라가 설치했다. 왕망은 통로라 했는데 유주에 속했다.

  68,802호이고, 인구는 264,116명이다.

  12개 현인데 어양(漁陽), 호노(狐奴), 로(路), 옹노(雍奴), 천주(泉州), 평곡(平谷), 안락(安樂), 제해(厗奚), 광평(獷平), 요양(要陽), 백단(白檀), 골염(滑鹽)이다.

 

우북평군(右北平郡)은 진(秦)나라가 설치했다. 왕망은 북순(北順)이라 했는데 유주에 속했다. 66,689호이고, 인구는 320,780명이다.

  16개 현인데 평강(平剛), 무종(無終), 석성(石成), 정릉(廷陵), 준미(俊靡), 자(薋), 서무(徐無), 자(字), 토은(土垠), 백랑(白狼), 석양(夕陽), 창성(昌城), 려성(驪成), 광성(廣成), 취양(聚陽), 평명(平明)이다.

 

  요서군(遼西郡)은 진(秦)나라가 설치했다. 유주에 속했다. 72,654호이고, 인구는 352,325명이다.

  14현인데 저려(저慮), 해양(海陽), 신안평(新安平), 유성(柳城), 영지(令支), 비여(肥如), 빈종(賓從), 교려(交黎), 양락(陽樂), 호소(狐蘇), 도하(徒河), 문성(文成), 임유(臨渝), 류(?)이다.”   

 

  “요동군(遼東郡)은 진(秦)나라가 설치했다. 유주에 속했다. 59,972호이고, 인구는 272,539명이다.

  18현인데 양평(襄平), 신창(新昌), 무려(無慮), 망평(望平), 방(房), 후성(候城), 요대(遼隊), 요양(遼陽), 험독(險瀆), 거취(居就), 고현(高顯), 안시(安市), 무차(武次), 평곽(平郭), 서안평(西安平), 문(文), 번한(番汗), 답씨(沓氏)이다."

 

[참고]

후한서에는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어양군이 2,000리, 우북평군이 2,300리, 상곡군이 3,200리, 요서군이 3,300리, 요동군이 3,600리, 현토군이 4,000리, 낙랑군이 5,000리 떨어져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고대의 10리는 지금의 2.3km에 해당한다.

 

  이때 연나라는 지금의 하북성 보정 부근으로부터 북경 부근까지 1천여리의 땅을 조선(고조선)으로부터 빼앗아 5군을 설치했던 것이라 생각되고,

  또한 연나라가 조양에서 양평까지 장성을 쌓아 호(胡)를 막았다는 것 역시 지금의 하북성 보정 부근으로부터 북경 창평 부근까지 장성을 쌓았다(필자주 : 이것이 바로 연장성이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