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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낙랑의 끈질긴 생명력 - 최초공개

윤여동 2009. 8. 20. 11:56

윤여동설  - 낙랑의 끈질긴 생명력 - 최초공개

 

   최리의 낙랑국이 서기 37년에 고구려 대무신왕의 침공을 받고 항복함으로써 이때 낙랑국이 멸망했으나, 서기 44년에 후한의 광무제가 고구려를 침공하여 살수 이남의 옛 낙랑 땅 일부를 되찾아 다시 설치했던 후한낙랑군.

  그런데 이 후한낙랑군도 서기 313년에 이르러 고구려 미천왕에게 그 땅을 빼앗기고 축출됨으로써 우리 역사에서는 더 이상 낙랑군이나 낙랑국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북제의 위수가 지은 위서(魏書) 권5 고종기 제5 화평(和平) 3년(A.D.462) 조를 보니,

  “봄 정월 계미일에 낙랑왕 만수가 죽었다 (春正月 癸未 樂浪王萬壽薨)”라고 기록되어 있어, 400여 년 전에 이미 멸망했을 낙랑국 왕이라는 의미의 “낙랑왕”이 갑자기 등장한다.

  그리고 이어서 태화(太和) 3년(A.D.479) 조에는,

  “여름 4월 계미일에 낙량왕 낙평이 죽었다(夏四月癸未 樂良王 樂平薨)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 “낙량(樂良)”은 “낙랑(樂浪)”의 오기이다. 판각을 하면서 “랑(浪)”자에서 삼수변을 빠뜨렸다.

 

  정시(正始) 3년(A.D.506) 조에는,

  “3월 기묘일에 낙량왕 장명이 살인에 연좌되었으므로 사사하고 국적에서 지웠다.(三月 己卯 樂良王長命坐殺人 賜死 國除)” 라고 기록되어 있고,

 

★ 낙랑왕이 살인에 연루되었다고 하여 북위가 낙랑왕을 잡아 죽일 수 있었고, 작위를 빼앗을 수 있었다는 것은 낙랑왕 장명이 실제 자신이 통치하는 독립된 나라에서 왕위에 올라 있었던 것이 아니라 북위의 한개 군, 현 정도에 해당하는 곳을 통치하는 명목상의 왕 또는 명예직 정도였음을 알 수 있다.

 

  효창(孝昌) 원년(A.D.525) 조에는,

  “2월 조서로서 낙량왕 장명의 본래 작위를 회복하여 그 아들 충에게 주었다(二月 詔追復樂良王長命 本爵 以其子忠紹之)”라고 기록되어 있어 그 아버지 낙랑왕 장평이 죽은 지 20년 쯤 후에 작위가 회복되어 그 아들 충을 다시 장평의 뒤를 이어 낙랑왕으로 임명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흥화(興和) 4년(A.D.542) 조를 보면,

  “6월 병신일에 시중이라는 작위를 회복하여 낙랑왕 충에게 주었다(六月 丙申 復前侍中 樂浪王 忠爵) 라고 기록되어 있다.

    

낙랑(樂浪),

그 끈질긴 생명력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낙랑이 바로 갈석산(碣石山)이 위치하고 있었던 낙랑 수성현 부근의 낙랑이었을까?

진 태강지리지에 "낙랑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된 곳이다"라고 기록했던 바로 그 낙랑.

 

★ 원래의 갈석산은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하고 있는 낭아산(狼牙山)을 말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이때의  낙랑은 313년에 살수 이남의 낙랑군(후한광무제가 설치했던 후한낙랑군)이 고구려 미천왕에게 그 땅을 빼앗기자 지금의 보정시 낭아산 부근으로 위치를 이동하여 다시 설치한 후 이때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