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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자료실 - 사기 흉노열전 번역문

윤여동 2009. 8. 23. 09:49

윤여동자료실 - 사기 흉노열전(번역문)

 

 

  흉노(匈奴)는 그 선조가 하후씨(夏后氏)의 먼 후손인 순유(淳維)라고 한다.

  당우(요순) 이전에는 산융(山戎), 험윤(獫狁), 훈육(葷粥)이라 불렀다.

  북만에 거주하며 가축을 따라 목축하며 옮겨 다닌다.

  그들의 가축으로 많은 것은 말, 소, 양이고, 기이한 가축은 낙타, 당나귀, 노새, 버새, 도도, 탄해 등이 있다.

  물과 풀을 쫓아 옮겨 다니며 성곽과 일정한 거처가 없고 농사짓지 않으나 각기 나뉘어진 영역이 있다.

  글자가 없고 말로써 약속한다.

  어린 아이도 능히 양을 타고 활을 당겨 새나 쥐를 쏘며, 조금 더 자라면 여우나 토끼를 쏘아 잡아먹는다.

  장정들의 힘은 능히 활을 당길 수 있고  모두 무장기병이 된다.

  그들의 풍속은 여유로울 때는 가축을 기르며, 짐승 사냥하는 것을 생업으로 삼고 위급할 때는 사람들이 저마다 전투를 익혀 침벌하니 그들의 천성이 그러하다.

  멀리 떨어졌을 때는 활과 화살을 사용하고, 접근전일 때는 칼과 창을 사용한다. 

  유리하면 진격하고 불리하면 퇴각하니 도망하여 숨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이익이 있으면 예의를 차리지 않는다.

  군왕 이하가 모두 가축의 고기를 먹고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고 털로는 모직물을 만들어 입는다.

  건장한 자가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노약자는 그 나머지를 먹는다.

  건장함을 귀히 여기고 노약함을 천시한다.

  아버지가 죽으면 아버지의 후처는 (아들이) 아내로 삼고, 형제가 죽으면 모두 그 (죽은 이의) 처를 취해 아내로 삼는다.

  그들의 풍속에서는 이름이 있고 이름 부르는 것을 꺼리지 않으나 성씨는 없다.

 

   하나라의 도가 쇠하니 공유(公劉)가 벼슬을 버리고 서융의 풍속을 따르며 빈(豳) 땅에서 읍을 이루었다.

  그 3백여 년 후,

  융적이 대왕단보를 공격하자 단보가 기산(岐山) 기슭으로 달아나니 빈 사람들이 모두 단보를 따라와 읍을 이루어 주(周)나라를 세웠다.

  그 1백여 년 후,

  주나라 서백 창(昌)이 견이를 쳤다.

  그 10여 년 후,

  무왕(武王)이 주(紂,은 주왕)를 치고 낙읍(雒邑)을 차지하였고, 다시 풍, 호에 거주하며 융이를 경수, 낙수 북쪽으로 내쫓고는 때에 맞춰 입공하게 하고 황복(荒服)이라 명명했다.

  그 2백여 년 후,

  주나라의 도가 쇠하였는데, 주 목왕이 견융을 쳐서 백랑과 백록 네 마리를 얻은 뒤 돌아왔다.

  이 이후로 황복에서는 (조공하러) 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주나라에서 마침내 보형이라는 법을 만들었다.

  목왕 이후 2백여 년 후,

  주 유왕이 총희 포사 때문에 신후와 서로 사이가 나빠졌다.

  신후가 노하여 견융과 함께 여산(驪山) 기슭에서 주 유왕을 공격해 죽이니 마침내 (견융이) 주나라의 초호를 차지하고, 경수, 위수 사이에서 거주하며 중국을 침범하고 포학하게 굴었다.  

  진(秦) 양공이 주나라를 구원하니 이에 주 평왕이 풍, 호를 떠나 동쪽 낙읍(낙양)으로 옮겼다.

  당시 진 양공이 융을 쳐서 기산(岐山)에까지 이르렀고, 비로소 제후의 반열에 올랐다.

  이후 65년 후,

  산융이 연(燕)나라를 넘어 제(齊)나라를 치자 제나라 희공이 교외에서 싸웠다.

  그 44년 후,

  산융이 연(燕)나라를 쳤다.

  연나라가 제나라에게 위급함을 고하였고 제 환공이 북쪽으로 산융을 치자 산융이 달아났다.

  그 20여 년 후,

  융적이 낙읍으로 와서 주 양왕을 치자 양왕이 정(鄭)나라의 범읍으로 달아났다.

  당초 주 양왕이 정(鄭)나라를 치고자 융적의 여인에게 장가들어 그녀를 왕후로 삼고는 융적의 군대와 함께 정나라를 쳤다.

  그 뒤 적후를 내치자 적후가 원한을 품었다.

  한편, 양왕의 계모인 혜후에게 자대라는 아들이 있어 그를 옹립하고자 하였으므로, 이에 혜후가 적후, 자대와 함께 내응하여 융적에게 성문을 열어주니, 이 덕분에 융적이 성으로 들어올 수 있었고 주 양왕을 격파하여 내쫓고 자대를 천자로 세웠다.

  그리하여 융적이 혹은 육혼에 거주하거나 동쪽으로 위(衞)나라에까지 이르게 되어 중국을 침범하고 포학하게 굴었다.

  중국에서 이를 매우 미워하였으니 이 때문에 시인(詩人)이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융적의 침공에 응하여 험윤을 정벌하며 넓은 초원에 이르렀도다.

수많은 수레를 이용하여 저 북방에 성을 쌓았다네.” 

 

  주 양왕이 (도성) 바깥에 거처한 지 4년 째,

  사자를 보내 진(晉)나라에 위급을 고했다.

  진(晉) 문공이 즉위하여 패업을 닦고자 하여 이에 군대를 일으켜 융적을 쳐서 내쫓고 자대를 주살하고 주 양왕을 맞아들여 낙읍에 거처하게 했다.

  당시에는 진(秦)나라와 진(晉)나라가 강국이었다.

  진(晉) 문공이 융적을 물리치고 하서(황하서쪽)의 은, 낙 사이에 거처하게 하고 이들을 적적, 백적이라 불렀다.

  진(秦) 목공이 유여를 얻으니 서융 8국이 진나라에 복종하였다.

  그리하여 농산 서쪽에는 면제, 곤융, 적, 환, 기산, 양산, 경수, 칠수 북쪽에는 의거, 대례, 오지, 구연이라는 융이 있었다.

  그리고 진(晉)나라 북쪽에는 임호, 누번이라는 융이 있었고,

  연(燕)나라 북쪽에는 동호, 산융이 있었다.

  각기 분산되어 계곡에 거주하며 저마다 군장이 있었고, 가끔 많은 수가 모인 것이 백여 융에 이르렀으나 서로 통일되지는 못했다.

  이로부터 백여 년 후,

  진(晉) 도공이 위강을 사자로 보내 융적과 화친하니 융적이 진나라에 조공했다.

  그 백여 년 후,

  조양자가 구주를 넘어 대(代)를 격파하여 아우르고 호(胡), 맥(貉)에까지 이르렀다.

  그 후 (조양자는) 한(韓), 위(魏)와 함께 지백을 멸하고 진(晉)나라 땅을 나누어 가지니, 즉 조(趙)나라가 대와 구주이북을 차지하고, 위(魏)나라는 하서와 상군을 차지하여 융과 접경했다.

  그 후 의거(義渠) 융이 성곽을 쌓아 스스로 지켰으나 진(秦)나라가 점차 잠식하였고, 혜왕 때에 이르러 마침내 의거의 25개성을 함락시켰다. 

  혜왕이 위(魏)나라를 공격하자 위나라가 서하와 상군을 모두 진(秦)나라에게 주었다.

  진(秦) 소왕 때, 의거융왕이 선태후와 사통해 아들 둘을 낳았다.

  선태후가 의거융왕을 속여 감천에서 죽이고는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의거를 쳐서 멸했다.

  이에 진나라가 농서, 북지, 상군을 차지하고 장성을 쌓아 호를 막았다.

  그리고 조(趙) 무령왕 또한 풍속을 바꾸고 호의 복장을 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혀 북쪽으로 임호, 누번을 격파했다.

  장성을 쌓아 대(代)에서부터 음산(陰山)과 나란히 고궐(高闕)에 이르기까지 새(塞)를 만들고 운중, 안문, 대군을 설치했다.

  그 후 연(燕)나라에 현장 진개란 이가 있어 호(胡)에 볼모로 갔는데 호가 그를 매우 신임했다.

  (연나라로) 되돌아와 동호(東胡)를 습격해 격파하니 동호가 1천여 리를 물러났다.

  형가와 함께 진왕(진시황)을 암살하려 했던 진무양이란 자가 진개의 손자이다.

  연나라 또한 장성을 쌓아 조양(造陽)에서부터 양평(襄平)에 이르렀고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군(遼東郡)을 설치해 호를 막았다.

  당시 관복을 입고 관대를 차던 전국시대 일곱 나라 중 세 나라(진, 조, 연)가 흉노와 접경했다.

  그 후 조(趙)나라 장수 이목이 있을 때에는 흉노가 감히 조나라의 변경을 침입하지 못했다.

  뒤에 진(秦)나라가 여섯 나라를 멸하였고, 시황제가 몽염을 보내 10만을 거느리고 북쪽으로 호를 공격하게 하여 하남(섬서성 북부 황하남쪽) 땅을 모두 빼앗았다.

  하수(황하)를 따라 새를 만들고  하수 변에 44개 현성을 쌓아 적수를 옮겨 이를 채웠다.

  그리고 직도를 뚫어 구원에서 운양에까지 이르렀고, 변경 산의 험준함을 활용하며, 계곡을 참호로 하고 수선할 수 있는 곳은 수선해서 쓰며, 임조(臨洮)에서 요동(遼東)까지 (장성을 쌓아) 1만여 리에 이르렀다.

  또한 하수를 건너 양산, 북가 땅을 차지했다.

  진시황 32년 연나라 사람 노생이 사자로 나가 바다로 들어갔다가 돌아와서 귀신의 일을 고하며 녹도서(錄圖書)를 올리니 ‘진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호(胡)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에 시황이 장군 몽염에게 30만 명을 이끌고 가서 북쪽으로 호를 공격하고 하남땅을 약취했다.

  당시에는 동호(東胡)와 월지가 강성했다.

 

  흉노(匈奴) 선우는 두만(頭曼)이란 자였는데, 두만은 진(秦)나라를 이기지 못하자 북쪽으로 옮겨갔다.

  10여 년 뒤 몽염이 죽고, 제후들이 진나라를 배반해 중국이 소란해지자 진나라가 변경으로 옮겼던 적수들이 모두 다시 떠나게 되었다.

  이에 흉노가 여유를 얻게 되니 다시 점차 하수를 건너 남쪽으로 와서 예전 새(塞)에서 중국(中國)과 접경했다.

  선우에게는 모돈(冒頓 : 묵돌)이라는 이름의 태자가 있었다.

  뒤에 총애 받던 (선우의) 왕후(閼氏,연지)가 작은 아들을 낳자 선우는 모돈을 폐하고 작은 아들을 (태자로) 세우고자 모돈을 월지에 볼모로 보냈다.

  모돈이 월지에게 볼모로 간 뒤 두만이 월지를 급히 공격했다.

  월지가 모돈을 죽이려 하자 모돈이 그 나라의 좋은 말을 훔쳐 타고 달아나 (흉노로) 되돌아왔다.

  두만이 이를 장하게 여겨 그로 하여금 기병 1만 기를 거느리게 했다.

  모돈은 명적을 만들어 자신의 기병들에게 활쏘기를 익히게 하며 영을 내리기를, “명적을 쏘는 곳을 향해 활을 쏘지 않는 자는 참한다.” 하였다.

  짐승을 사냥하러 나가서 명적을 쏘는 곳으로 활을 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매번 그를 참했다.

  얼마 뒤 모돈이 몸소 명적으로 자신이 아끼는 말을 쏘았는데, 좌우에서 감히 쏘지 못하는 자가 있자 모돈은 말을 쏘지 않은 자를 곧바로 참했다.

  얼마 뒤 다시 몸소 명적으로 자신의 애처를 쏘았는데 좌우에서 몹시 두려워하며 쏘지 못하는 자가 있자 모돈이 또 그를 참했다.

  얼마 뒤 모돈이 사냥 나가 명적으로 선우가 아끼는 말을 쏘자 좌우에서 모두 함께 쏘았다.

  이에 모돈은 그의 좌우가 모두 쓸 만하다는 것을 알고는 그의 부친인 선우 두만을 따라 사냥 나가 명적으로 두만을 쏘니 그의 좌우 또한 명적을 좇아 활을 쏘아 선우 두만을 죽였다.

  그리고는 그의 계모와 동생, 그를 따르지 않는 대신들을 모두 죽이고 모돈이 스스로 즉위하여 선우가 되었다.

  모돈이 즉위하였을 때 당시 동호가 강성하였는데, 모돈이 부친을 죽이고 스스로 즉위했다는 말을 듣고는 사자를 보내 모돈에게 이르길, 두만 때부터 있던 천리마를 얻고 싶다고 했다.

  모돈이 군신들에게 묻자 군신들이 모두 말했다.

  “천리마는 흉노의 보마이니 주지 마십시오.”

  모돈이 말했다.

  “다른 나라와 더불어 이웃하고 있는 나라로서 어찌 말 한 마리를 아끼겠는가?” 하고는 천리마를 주었다.

  얼마 뒤, 동호는 모돈이 자신들을 두려워한다 여기고 사자를 보내 모돈에게 이르기를, 선우의 왕비 한 명을 얻고 싶다고 했다.

  모돈이 다시 좌우에 묻자 모두들 노하여 말했다.

  “동호가 무도하여 왕비를 달라 합니다. 청컨대 동호를 치십시오.”

  모돈이 말했다.

  “다른 나라와 더불어 이웃하고 있는 나라로서 어찌 여자 한 명을 아끼겠는가?” 그리고는 총애하는 왕비를 동호에게 주었다.

  동호왕이 더욱 교만해져 서쪽으로 침범하였다.

  흉노 사이에 아무도 살지 않는 버려진 땅이 천여 리에 달하여 각기 그 주변에 거주하며 경계초소를 두었었다.

  동호가 사자를 보내 모돈에게 말했다.

  “흉노와 우리 경계에 있는 초소 바깥 버려진 땅은 흉노가 이를 수 없는 곳이니 우리 강역으로 하고자 한다.”

  모돈이 군신들에게 묻자 군신들 중 어떤 이가 말했다.

  “그 곳은 버려진 땅이니 주어도 되고 주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자 모돈이 대노해 말했다.

  “땅이란 나라의 근본인데 어찌 이를 준단 말인가?”

  그리고는 땅을 주자고 말한 이들을 모두 참했다.

  모돈이 말에 오르며 나라 안 사람들 중 뒤처지는 자는 참한다 영을 내리고는 마침내 동쪽으로 동호를 습격했다.

  동호는 당초 모돈을 얕잡아보고 방비하지 않았었다.

  모돈이 군대를 이끌고 도착해 공격하여 동호왕을 대파하여 멸하고, 그들의 백성과 가축과 재산을 노획했다.

  돌아온 뒤 서쪽으로 월지를 공격해 격파하고, 남쪽으로 누번, 백양 하남왕을 아우르고, 진(秦)나라가 몽염을 시켜 빼앗은 흉노 땅을 모두 다시 되찾아 한나라와 더불어 옛 하남의 새에서 관문을 맞대고 조나, 부시에까지 이르렀고, 마침내 연(燕)과 대(代)를 침범했다.

  당시 한나라 군대는 항우와 서로 대치하느라 중국이 전란으로 피폐해져 있었으니 이 때문에 모돈이 스스로 강성해질 수 있었고 활을 쏠 수 있는 군사가 30여만 명에 이르렀다.

  순유(淳維)부터 두만(頭曼)에 이르기까지 천여 년 동안 때로는 강대하고 때로는 약소했으며 따로 흩어지고 분리된 것이 오래되었으니 대대로 전해오는 바를 차례대로 적을 수는 없다.

  그러나 모돈 때에 이르러 흉노가 가장 강대해져 북이들을 모두 복종시키고 남쪽으로는 중국에 필적하는 나라가 되었으므로 대대로 전해오는 그 나라의 관호(官號)를 다음과 같이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

  좌우현왕(左右賢王,좌현왕과 우현왕),

  좌우곡려왕(左右谷蠡王),

  좌우대장(左右大將),

  좌우대도위(左右大都尉),

  좌우대당호(左右大當戶),

  좌우골도후(左右骨都侯)를 둔다.

  흉노에서는 현명함을 일컬어 도기라 하니 이 때문에 늘 태자를 좌도기왕으로 삼는다.

  좌우현왕으로부터 그 이하 당호에 이르기까지 크게는 1만 기, 적게는 수천 기를 이끄는 자가 모두 24장이 있고 이들을 만기라 호칭한다.

  여러 대신들은 모두 세습되는 관직이다.

  호연(呼衍)씨, 난(蘭)씨, 수복(須卜)씨가 있었으니, 이 세 성씨가 흉노의 귀족이다.

 좌방(左方)의 여러 왕(王), 장(將)들은 동쪽 방향에 거주하며, 상곡 바깥을 마주보고, 동쪽으로 예맥, 조선에 접한다.

  우방(右方)의 왕(王), 장(將)들은 서쪽 방향에 거주하며 상군 서쪽을 마주보고, 월지, 저, 강에 접한다.

  선우(單于)가 직접 다스리는 곳은 대(代), 운중(雲中)을 마주본다.

  각기 나뉘어진 영역이 있으며 물과 풀을 따라 옮겨 다니는데, 좌우현왕, 좌우록려왕의 영역이 가장 크고 좌우골도후는 정치를 보좌한다.

  여러 24장 또한 각자 천장, 백장, 십장, 비소왕, 상봉, 도위, 당호, 저거와 같은 속관을 둔다.

  매년 정월에 여러 장들이 선우정에서 조그만 대회를 열고 제사지낸다.

  5월에는 용성에서 큰대회를 열고 그들의 선조, 천지, 귀신에 제사지낸다.

  가을에 말이 살찌면 대림에서 대회를 열어 사람과 가축의 숫자를 헤아린다.        흉노의 법에서는 (사사롭게 싸울 때) 칼을 한 척 이상 뽑으면 사형에 처하고, 도둑질하면 그의 가산을 몰수한다.

  작은 죄를 저지르면 태형에 처하고 큰 죄를 지으면 사형에 처한다.

  오래도록 옥에 가둔다고 해도 (기껏해야) 열흘을 넘지 않으니 나라 전체를 통털어 죄수가 수 명을 넘지 않는다.

  거사할 때는 별과 달을 살펴 달이 차면 싸우고, 달이 이지러지면 퇴군한다.

  그들이 싸울 때에는 적을 죽이거나 포로를 잡은 자에게 한 잔의 술을 내리고 노획품을 그에게 주며 포로는 노비로 삼는다.

  이 때문에 그들이 싸울 때는 사람들이 저마다 이익을 다투어 유인하고 적을 포위하는데 능하다.

  그러므로 그들이 적을 발견하면 이익을 좇아 새처럼 모여들고 곤경에 처할  때는 와해되어 구름처럼 흩어진다.

  싸울 때 전사한 동료를 데리고 귀환한 자는 그 전사자의 재산을 모두 얻는다.

  그 뒤 북쪽으로 혼유, 굴야, 정령, 격곤, 신려국을 복종시켰다.

  그리하여 흉노의 귀인, 대신들은 모두 탄복하며 모돈 선우를 현명하다 여겼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