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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김유신의 부인과 자녀들

윤여동 2009. 9. 28. 22:02

윤여동설 - 김유신의 부인과 자녀들


  김유신은 서기 595년에 태어나 673년 7월 1일에 79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런데 삼국사기를 보면, 태종무열왕 2년(A.D.655) 조에, “왕의 딸 지조가 대각찬 유신에게 시집갔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우리를 매우 당혹스럽게 한다.

  왜냐하면 이때 김유신의 나이가 환갑이기 때문이다.


★ 지조는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가 김춘추와 혼인하여 낳은 딸이므로 환갑 나이의 김유신은 이때 나이어린 조카와 혼인을 했다는 말이 된다.


  기록을 보면 당시 신라에서는 20세 전후 쯤의 나이에 혼인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김유신은 환갑이 될 때까지 결혼을 하지 않고 살다가 환갑이 되어서야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딸 지조와 혼인을 했고, 그 사이에서 삼광, 원술, 원정, 장이, 원망의 다섯 아들과 네 딸을 낳았던 것일까?


★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전에는 김유신에게 또 한사람의 서자가 있었는데, 이름은 군승이고, 그 어머니의 성은 전해지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삼국사기 기록대로라면 김유신에게는 6남 4녀의 자녀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화랑세기에는 김유신이 18세 때인 612년에 하종의 딸 영모와 혼인을 했고, 사이에서 진광, 신광, 작광, 영광의 네 딸을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 신라의 혼인 풍습으로 보아 화랑세기의 기록도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이 많다고 할 수 있다.

 

★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진광은 김유신의 여동생 정희의 아들 김흠돌과 결혼하였고,

신광은 신라 30대 문무왕이 태자 시절에 그의 첩이 되었으며, 

작광은 보로전군과 결혼하였고

영광은 김유신의 조카 반굴과 혼인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만약 삼국사기의 기록도 옳고 화랑세기의 기록도 옳다면,

  김유신은 젊은 시절에 미실의 막내아들인 하종의 딸 영모라는 여인과 결혼을 하여 네 딸을 두었고, 또 영모의 언니인 유모라는 여인을 첩으로 삼기도 했으나 환갑이 될 때까지 아들이 없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하여 대가 끊어질 위기에 처하자 이를 염려한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의 여동생인 문명왕후가 딸 지조를 김유신에게 시집보내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물론 이때 지조의 나이는 20세쯤이었을 것인데, 이는 33대 성덕왕 12년(A.D.712년) 조에, “가을 8월에 김유신의 아내를 부인으로 봉하고, 해마다 곡식 1천석을 주었다”라는 기록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때까지도 지조가 살아있기 때문에 그를 알 수 있다.(지조가 부인으로 봉해질 때 약 80세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됨)


★ 성덕왕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증손자로서 지조의 손자벌이다.  


  그렇다면 김유신의 자녀들은 영모소생의 네 딸(진광, 신광, 작광, 영광)과 지조 소생의 다섯아들(삼광, 원술, 원정, 장이, 원망)과 네 명의 딸이 있었고, 이름 모를 첩의 소생 군승이 있었다는 말이 되니 합하면 김유신에게는 6명의 아들과 8명의 딸이 있었다는 말이 되는데,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의 첫 부인 영모의 이름이 나타나고 있지 않으므로 혹시 지조 소생으로 기록되어 있는 네 딸이 사실은 영모소생의 네 딸을 말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이름이 전해지지 않았다는 김유신의 첩으로서 서자 군승을 낳은 여인이 혹시 영모의 언니 유모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지조는 환갑 나이의 김유신과 혼인하여 계속 아들 다섯 만을 낳았다고 할 수 있고, 김유신에게는 총 6남 4녀의 자녀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김유신의 첫 부인이었던 영모라는 여인의 이름이 왜 삼국사기에서 지워졌는지 아직까지는 그 명확한 이유를 알 수 없다.

  혹시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반역자가 되어 역사서에서 지워져 버렸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