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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김춘추의 첫 부인은 보량이 아니라 보라이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09. 10. 7. 18:03

윤여동설 - 김춘추의 첫 부인은 보량(宝良)이 아니라 보라(宝羅)이다 - 최초주장

 

 

  신라 29대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서기 603년에 출생하여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키고 난 그 다음해인 661년 6월에 59세의 나이로 죽어 서라벌(금성) 영경사 북쪽에 묻혔다.

  그런데 요즈음 김춘추의 첫 부인이 보량이냐 보라냐를 놓고 의견들이 분분한데,

화랑세기 필사본을 꼼꼼히 읽어본 사람은 보라라고 하고, 대강대강 읽은 사람은 보량이라고 하는 것이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도 보량이라는 인물을 등장시키고 있어 시청자들은 김춘추의 첫 부인이 보량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김춘추의 첫 부인은 보량의 언니인 보라라는 여인이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김춘추의 첫 부인에 관해서 나타나지 않지만 화랑세기 필사본을 보면,

  진평왕과 보명 사이에서 태어난 딸 양명공주가 보종공(설화랑공과 미실 사이에 태어난 아들)에게 시집가 두 딸을 낳았는데, 보라와 보량이었고,

  양명공주는 또 염장공(진흥왕의 아들 천주공과 지도태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과의 사이에서 장명공, 유모, 영모를 낳았으며,

  또 양명공주는 하종공(세종공과 미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과 미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모종공과의 사이에서 양도공을 낳았다.    

  그런데 보량은 후일 진평왕의 후궁이 되어 보로전군을 낳았으나 진평왕의 두 번째 왕비였던 승만왕후의 질투로 궁에서 쫓겨 나오게 되는데, 보량은 평소에 양도공을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시집가기를 원치 않았다고 한다.

  그러자 그를 알아차린 그녀의 어머니 양명공주가 진평왕에게 주청하여 자신의 아들인 양도공과 자신의 딸인 보량을 혼인시켜 양효공을 낳게 되고, 양도공이 22세 풍월주가 되자 화주의 지위에 오르기도 했는데, 후일 양도공이 전사했다고 소식을 잘못 전해 듣고 자결했다고 한다. 

  양도공은 문무왕 9년인 669년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되어 670년 정월 장안에서 죽어 그곳에 묻히게 된다.    

 

☆ 양도공(609년생)과 보량(604년생)은 아버지는 다르지만 어머니는 같은 이부동모 남매사이였다. 보량의 나이가 양도공보다 다섯 살이 위였다.   

    

 그런데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보량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으면서도 김춘추의 첫 부인을 또 보량이라 기록했다가 보라라고 수정해 놓았는데, 이를 보면 필사자가 보량으로 필사했다가 뒤에 잘못이 발견되자 수정해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김춘추의 첫 부인은 보량이 아니라 보라인 것이고, 이 보라라는 여인은 김춘추와의 사이에서 맏딸 고타소를 낳게 되고, 그 후 고타소의 동생(김문주)을 낳고 죽은 것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이때 남자아이를 낳고 그 후휴증으로 죽은 듯하다.

 

☆ 김춘추의 첫 부인 보라가 낳다가 죽었다는 고타소의 남동생은 후일 당나라로 가서 불교에 귀의하여 등신불이 된 김교각 스님(속명은 김문주)입니다.

  지금 중국 사람들이 지장왕보살로 받들고 있는 구화산 화성사의 신라왕자 김교각 스님은 바로 신라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둘째 아들 김문주로서 지금까지도 그의 등신불이 육신보전에 모셔져 있습니다.

  구화산 화성사에 갈 기회가 있으면 꼭 찾아보시기 바라고, 그 등신불 앞에서 소원을 빌면 소원 한가지씩은 꼭 들어준다고 합니다. 

 

  그리고 김춘추의 맏딸 고타소에 관한 기록이 삼국사기 선덕여왕 11년(A.D.642) 조에 나타나고 있는데, 이때 김춘추에게는 성장한 딸이 있어 품석에게 시집을 보냈으나 대야성이 함락되어 남편인 품석과 함께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이때 백제에서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도독인 품석과 김춘추의 딸 고타소의 목을 잘라 사비로 보냈다고 하는데, 김춘추가 20세쯤 보라와 혼인하여 바로 딸을 낳았다면 고타소는 623년생 쯤 될 것이므로 대야성에서 그녀가 죽을 때 20세쯤 되었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김춘추는 이미 622년경에 이미 보라라는 여인과 혼인하여 고타소라는 딸도 하나 낳은 상태였을 것인데, 김유신의 여동생인 문희와 또 관계를 가져 임신을 시키게 된다.

 

☆ 이때 임신한 아이가 곧 후일 문무왕이 되는 김법민으로서 626년에 태어나게 된다. 

 

  그리하여 김춘추가 입장이 곤란해져 머뭇거리자, 김유신은 자기 여동생 문희를 시집도 안간 처녀가 임신을 했다하여 불태워 죽이겠다고 하게 되고, 김춘추는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된 선덕공주의 도움을 받아 문희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이게 된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보라부인이 아이를 낳고 그 후유증으로 죽게 되자 문희가 정궁부인이 되었다가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자 왕후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김춘추의 첫 부인은 보라부인이지 보량이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