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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2010년 대한민국의 국운은?

윤여동 2010. 1. 1. 04:04

윤여동설 - 2010년 대한민국의 국운은?

  

 

  서기 2010년(단기4343년)은 경인년(庚寅年)이다.

  역사적으로 삼국시대 경인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었을까?       

  역사를 알면 2010년 대한민국의 국운도 알 수 있다. 


기원전 31년 경인년

신라 : 혁거세 27년으로서 전해인 기원전 32년 기축년에 금성에 왕궁을 완공하여 왕국으로서의 면모를 완전하게 갖춘 해였다.

고구려 : 추모왕 7년으로서 전해인 기원전 32년에 태백산 동남방에 위치한 행인국을 쳐 그 땅을 고구려 땅으로  만들어 강역을 넓혔고, 다시 북옥저를 치려고 준비 중에 있던 해였다. 나라가 점점 융성해져 가던 때였다.


서기 30년 경인년

신라 : 3대 유리이사금 7년에 해당하는 해인데, 이때 신라는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어 도솔가를 지어 부를 정도로 태평하던 시기였다.  

고구려 : 3대 대무신왕 13년으로서 낙랑동부도위를 쳐서 빼앗아 고구려 땅으로 만든 해이고, 매구곡 사람 상수가 그 동생 위수 그리고 집안동생 우도 등을 데리고 귀순하여 온 해이다. 

백제 : 2대 다루왕 3년으로서 동부의 흘우가 말갈과 마수산 서쪽에서 싸워 이겼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아 왕이 기뻐하여 흘우에게 말 열 마리와 벼 5백석을 상으로 주어 백제가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가던 해였다.


서기 90년 경인년

신라 : 5대 파사이사금 11년으로서 전국에 감찰관리(암행어사)를 파견하여 주주나 군주로서 공무에 충실하지 못하여 농토를 많이 묵히는 자를 감찰하여 강직 또는 실직시킨 해이다.

고구려 : 태조대왕 38년으로서 계속적인 정복전쟁으로 대제국으로 발전해 가던 시기였다. 

백제 : 3대 기루왕 14년이다.

봄3월 크게 가물어 보리 싹이 죽었고,

여름5월 태풍이 불어 나무를 쓰러뜨려 흉년이 든 해이다.      


서기 150년 경인년

신라 : 7대 일성이사금 17년이다.

여름4월부터 비가 내리지 아니하다가 7월이 되어서야 비가 내려 흉년이 든 해이다.

고구려 : 7대 차대왕 5년인데, 차대왕은 자신의 형인 태조대왕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여 왕위에 오른 사람이고,

서기 149년 여름4월 그믐에 일식이 있었고, 5월에 오성이 동쪽에 모였다.

겨울12월 물이 얼지 않았다.

서기 153년 여름6월 서리가 내렸다.

겨울12월 우뢰와 지진이 있었고, 그믐에는 객성이 달을 범했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천재지변이 심한 때였다.    

백제 : 4대 개루왕 23년인데, 기록이 없다.


서기 210년 경인년

신라 : 10대 나해이사금 15년이다.

봄과 여름이 가물어 흉년이 들자, 관리를 파견하여 군과 읍의 죄수들의 죄목을 심사하여 참형, 교형에 해당하는 죄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방면함으로써 하늘의 노여움을 풀어보고자 한 해였다.

고구려 : 10대 산상왕 14년인데, 고구려는 전해인 209년 10월에 도읍을 국내로부터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겨 강역을 넓히려 하던 때였다.

백제 : 5대 초고왕 45년이다.

봄2월 적현성과 사도성 두 성을 쌓고 동부의 민가들을 그곳으로 옮겼다.

겨울10월 말갈이 사도성에 와서 치다가 이기지 못하자 성문에 불을 지르고 도망했는데, 이후 말갈은 백제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서기 270년 경인년

신라 : 13대 미추이사금 9년에 해당하는 해인데, 2년 전인 268년에는 봄과 여름에 비가 내리지 않았다는 기록이 나타나고, 2년 후인 272년에는 가을 7월에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을 해쳤다는 기록이 나타나고 있으니 경인년을 중심으로 그 전후기간이 대체적으로 기후변화가 심했던 때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 12대 중천왕이 죽고 13대 서천왕이 왕위에 오른 해이다.

백제 : 8대 고이왕 37년에 해당하는 해인데, 269년 9월에 혜성이 자미궁 성좌에 나타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기 330년 경인년

신라 : 16대 흘해이사금 21년이다.

처음으로 벽골지를 만들었는데, 그 둑의 길이가 1천8백보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는 이를 지금 김제 벽골제라 하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다.

고구려 : 15대 미천왕 31년이다.

후조의 석륵에게 사신을 보내 싸리나무로 만든 화살을 선물했다.

백제 : 11대 비류왕 27년에 해당하는 해인데, 그 다음해인 331년 기록을 보면,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어 풀과 나무가 마르고 강물이 말랐다.

가을 7월 이때에 이르러서야 비가 내리므로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을 지경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가뭄에 대비해야 한다. .


서기390년 경인년

신라 : 17대 나물이사금 35년에 해당하는 해인데, 그 전해인 389년 기록을 보면, 봄 정월 서울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2월에 흙비가 내렸다. 가을 7월 메뚜기 떼가 생기고 곡식이 잘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대비해야 한다.

고구려 : 18대 고국원왕 7년인데, 전해인 389년 조의 기록을 보면, “봄에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을 지경이었으므로 왕이 나라의 창고를 열어 구제했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고, 가을 9월에는 “백제가 침범하여 남쪽 국경 부락을 약탈하여 돌아갔다”는 기록이 이어지고, 390년 9월에도 “백제가 달솔 진가모를 시켜 도압성을 쳐서 부수고 백성 2백명을 사로잡아 갔다”는 기록이 이어진다. 가뭄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백제 : 16대 진사왕 6년이다.

가을7월 혜성이 북하성좌에 나타났다.

9월 왕이 달솔 진가모를 시켜 고구려를 치게하여 도곤성(도압성의 오기?)을 함락시키고 2백명을 사로잡았다. 왕이 진가모를 임명하여 병관좌평을 삼았다. 겨울 10월 왕이 구원에서 사냥을 하다가 7일 만에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동성왕은 이때부터 정치를 등한시하고 무능한 왕이 되어간다.


서기 450년 경인년

신라 : 19대 눌지마립간 34년이다.

가을7월 고구려의 변방장수가 실직벌판에서 사냥하는 것을 하슬라 성주 삼직이 갑자기 군사를 출동시켜 습격하여 죽였다. 고구려 왕(장수왕)이 이것을 듣고 화가 나서 사신을 보내 말하기를 “내가 대왕과 더불어 우호관계를 맺어 매우 기뻐하고 있던 터에 이제 군사를 출동시켜 우리 변경의 장수를 죽이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하고는 즉시 군대를 출동시켜 우리나라(신라)의 서쪽 변경을 침범했다. 왕이 겸손한 말로 사과하니 그들이 바로 돌아갔다.

고구려 : 같은 기록이 고구려기록에는 440년 경진년 조에 “신라 사람이 우리의 변경을 습격하여 장수를 살해했다. 왕이 노하여 군사를 출동시켜 토벌하려고 했는데,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므로 중지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 : 20대 비유왕 24년에 해당하는 해인데, 삼국사기에는 기록이 없으나 송서(宋書)에는 원가 27년(A.D.450) 백제의 여비(비유왕)가 방물을 바치며 국서를 올려 사사로이 대사 풍야부를 서하태수로 삼은 것을 추인해 달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447년 조의 기록을 보면, “가을7월 가물어 곡식이 결실되지 않았으므로 백성들이 굶주려 신라로 떠나간 자가 많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서기510년 경인년

신라 : 22대 지증마립간 11년이다.

여름5월 지진으로 집이 쓰러지고 죽은 자가 있었다. 겨울 10월 번개쳤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천재지변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고구려 : 21대 문자왕 19년이다.

여름윤6월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겨울11월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웃나라와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백제 : 25대 무령왕 10년이다.

봄정월 명을 내려 제방들을 튼튼히 막게 하고 서울과 지방에서 놀고 먹는 자들을 내몰아다가 농사일을 시켰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에도 가뭄에 대비하고 식량 생산을 독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기 570년 경인년

신라 : 24대 진흥왕 31년이다.

여름6월 사신을 진(陳)니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고구려 : 25대 평원왕 12년이다.

겨울11월 진(陳)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백제 : 27대 위덕왕 17년이다.

고씨(북제)의 후주가 왕을 사지절시중 거기대장군 대방군공 백제왕으로 봉작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이 모두 활동범위를 넓혀가고 있는 것이다.


서기 630년 경인년

신라 : 26대 진평왕 52년이다.

대궐 정원의 땅이 갈라졌다.

고구려 : 27대 영류왕 13년에 해당하는 해인데, 그 전해인 629년 가을8월에 신라장군 김유신이 동쪽변경을 침범하여 낭비성을 함락시켰다.

9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는 기록이 있고,

631년 조에는 당나라에서 광주사마 장손사를 보내 죽은 수나라 전사들의 해골 묻은 곳에 제사를 지내고 당시에 세웠던 경관을 헐어버렸다.

봄2월 왕이 백성들을 동원하여 장성을 쌓았는데, 그 성은 동북쪽의 부여성으로부터 동남쪽으로 바다까지 1천여리였는데, 시작한지 16년 만에 준공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국방을 튼튼히 하고 있는 것이다.

백제 : 30대 무왕 31년이다.

봄2월 사비의 궁궐을 중수했다. 왕이 웅진성으로 갔다.

여름에 가물어 궁궐 중수 역사를 중지했다.

가을7월 왕이 웅진으로부터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어 가뭄이 심했음을 알 수 있다.


서기 690년 경인년

이때부터는 통일신라 시기이다.

신라 : 31대 신문왕 10년이다.

봄2월에 중시 원사가 병이 들어 사직하고 아찬 설원으로 중시를 삼았다.

겨울10월 전야산군을 설치하였다.


서기 750년 경인년

신라 : 35대 경덕왕 9년이다.

봄정월 시중 대정이 사직하고 이찬 조량이 시중이 되었다.

2월 어룡성 봉어 두 명을 두었다.


서기 810년 경인년

신라 : 41대 헌덕왕 2년이다.

봄정월에 파진찬 양종을 시중으로 삼았다.

하서주에서 붉은 까마귀를 진상하였다.

2월 왕이 친히 신궁에 제사지내고 사람을 보내 국내의 제방을 수축하였다.

가을7월 유성이 자미성좌에 들어가고 서원경에서 흰 꿩을 진상하였다.

겨울10월 왕자 김헌장을 당나라에 보내 금은으로 만든 불상과 불경 등을 바치고 아뢰기를 “순종의 명복을 빈다”고 하였다. 유성이 왕량성좌에 들어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길조가 많이 나타났고, 가뭄에 대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국제관계를 돈독히 하고 있다.


서기870년 경인년

신라 : 48대 경문왕 10년이다.

봄2월 사찬 김인을 당나라에 숙위로 보냈다.

여름4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5월 왕비가 죽었다.

가을7월 홍수가 났다.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

나라 사람들이 전염병에 많이 걸렸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역시 천재지변이 심했던 한해였음을 알 수 있다.


서기930년 경인년

신라 : 56대 경순왕 4년이다.

봄정월 재암성 장군 선필이 고려에 투항하니 태조가 융숭한 예절로 대우하고 상보라고 불렀다.

처음 태조(고려 태조 왕건)가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으려 할 때에 선필이 인도하여 주었었는데, 이때에  투항하게 되니 그의 공로를 생각하고 또한 늙었기 때문에 은총을 베풀고 표창하였다.

태조가 견훤과 더불어 고창군 병산 아래에서 싸워 크게 이기고,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견훤의 영향 하에 있던 영안, 하곡, 직명, 송생 등 30여군, 현이 차례로 태조에게 투항하였다.

2월에 태조가 사신을 보내 승전한 것을 고하매 왕이 보답으로 사신을 보내고 겸하여 서로 만나기를 청했다.

가을9월 나라 동쪽 바닷가의 주군 부락들이 모두 태조에게 투항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고려의 국운이 융성해져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 기록들을 종합하여 검토해보면,

  역사적으로 삼국시대의 경인년은 국운이 융성해 가던 해였으므로 대한민국의 2010년 경인년 국운 역시 대단히 좋은 한해가 될 것이다.

  국제적으로는 국위가 선양될 것이고, 한류가 전 세계적으로 전파되어 한국문화가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