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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가야왕후 허황옥이 황룡국 여자였다고라?

윤여동 2010. 6. 5. 12:40

윤여동설 - 가야왕후 허황옥이 황룡국(黃龍國) 여자였다고라?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 27년(A.D.8) 조를 보면,

  “봄 정월 왕의 태자 해명이 옛 도읍(졸본)에 남아 있었는데, 힘이 세고 용감했다.  황룡국왕이 이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 강궁(필자주 : 활을 말하는 것인데 맥궁일 것이다)을 선물했더니 해명이 사신이 보는 앞에서 그 활을 잡아당겨 꺾으면서 ”힘을 쓰지 않았는데도 활이 약해 부러졌다" 고 하여 황룡국왕이 그 말을 전해 듣고 매우 무안해 하였다는 기록이 보이고, 28년 조에는 그 후의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때 고구려는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긴 때였는데, 해명태자는 도읍이전을 반대하며 국내로 가지 않고 졸본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자 유리왕은 황룡국왕에게 자기 아들인 해명을 죽여달라고 부탁했으나 황룡국왕이 그를 죽이지 못하자 유리왕은 해명에게 칼을 보내 스스로 죽으라 명하게 되어 해명 태자는 창을 땅에 꽂아 놓고 말을 타고 달려와 그 창에 꽂혀 죽고 마는데, 이를 보면 황룡국이 졸본이나 국내성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던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필자는 여기에서 해명태자가 왜 죽어야만 했는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황룡국이라는 곳이 구체적으로 어디에 위치한 나라였는지, 금관가야 수로왕의 왕비였던 허황옥이 어느 항로를 따라 가야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밝혀보고자 하는 것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허왕후가 “아유타국 공주였고 성은 허씨요, 이름은 황옥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우리는 지금까지 이 아유타국이 인도에 있던 나라였다고 인식했고, 따라서 이때 허황옥이 인도를 출발하여 동북쪽으로 항해하여 머나먼 한반도 남해안에 도착하여 김수로왕과 혼인함으로써 왕후가 되었다고 역사를 해석해 왔다.     

  그런데 화랑세기 필사본 15세 풍월주 유신공 조를 보면,

  “금관가야는 수로청예왕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황룡국(黃龍國)여자 황옥(허황옥)을 아내로 맞이하여 거등을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어 우리를 매우 당혹스럽게 한다.

  왜냐하면 화랑세기는 신라 시대에 쓰여진 것이고, 삼국유사의 가락국기는 대강연간(대강은 요나라 도종의 연호로서 태강이라고도 하는데, 서기 1075-1084까지를 말한다)인 고려 문종 때 금관주지사 문인이 지은 것이라고 하므로 신라시대에 쓰여진 화랑세기가 당연히 정확할 것이기 때문이다.  

  화랑세기는 금관가야 수로왕의 왕비였던 허황옥이 졸본, 국내성 부근의 황룡국여인이었다고 하고,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금관가야는 지금의 발해 북쪽 중국 요녕성 호로도시 흥성 부근에 위치했던 나라였다.

  화랑세기 필사본의 기록이 옳다면 허황옥은 졸본(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이나 국내성(북경시 연경구 영녕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했던 황룡국을 출발하여 가야(요녕성 호로도시 흥성 부근)로 향했을 것이다.

  수로왕비 허황옥은 인도에서 한반도 경상도로 온 것이 아니라 지금의 북경시 연경구 영녕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했던 황룡국에서 요녕성 호로도시 흥성 부근에 위치했던 금관가야로 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