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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내몽골 파림좌기는 요(거란) 상경임황부가 아니라 발해의 상경용천부이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10. 8. 2. 08:32

윤여동설 - 내몽골 파림좌기는 요(거란) 상경임황부가 아니라 발해의 상경용천부이다 - 최초주장

 ( : 파림좌기의 발해 상경용천부 터로서 중국에서는 이곳을 요 상경임황부 터라고 하고 있는데 거짓말이다)

 

  요동(遼東)과 요서(遼西)라는 의미는 요수(遼水)를 중심으로 그 동쪽과 서쪽이라는 의미일 것인데, 거란족이 도읍을 임황(상경임황부가 된다)에 정하고는 국호를 “요(遼)”라고 하게 된다. 

  국호를 새로 정할 때 아무 인연도 없고, 역사, 지리적 관계도 없이 아무렇게나 정했을 리는 만무하고 거란족과 “요(遼)”가 무언가 특별한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국호를 “요(遼)”라고 정했을 것인데, 사서들은 거란족이 "요택(遼澤)"에서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 조선(이씨조선을 말함)의 경우에도 처음에 국호를 정할 때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던 고조선(왕검조선)에서 조선(朝鮮)을 따고, 이성계의 출생지 화령에서 화령(和寧)을 따 조선과 화령 둘 중에서 국호를 정하려고 했었다. 

  그렇다면 거란족은 무슨 이유로 이 “요(遼)”라는 글자를 따서 국호로 정했던 것일까? 

 

금사에는 요나라가 빈철(무쇠)처럼 단단하다는 의미로 국호를 요(遼)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요(遼)”와 “철(鐵)”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잘 이해되지 않는다.

 

  혹시 거란족이 차지하고 있던 땅이 고대로부터 “요(遼)”라고 불렸기 때문에 그 "요(遼)"를 를 따서 국호로 삼았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요 상경임황부는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요사 권37 지제7 지리지1에 기록되어 있는 상경도(上京道) 기록을 보면,

  “상경임황부는 본래 한(漢)나라 때의 요동군 서안평(西安平) 땅이다.

  신나라의 왕망은 북안평(北安平)이라 하였다.

  태조(야율아보기)가 천제(天梯), 별로(別魯) 등 세 산의 형세를 취하고 금착전(金齪箭)을 쏘아서 위전을 정하고 그곳을 용미궁(龍眉宮)이라 하였다.

  태조 신책(神冊) 3년(A.D.918)에 그곳에 성을 쌓고 이름을 황도(皇都)라 하였다가, 태조 천현(天顯) 13년(A.D.938)에 다시 이름을 상경(上京)이라 고치고 부(府)는 임황(臨潢)이라 불렀다.

  내류하(淶流河)는 서북으로부터 남류하여 도성의 삼면을 감싸듯 휘어져 흘러 동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북동쪽으로 흘러 안출하가 되고, 또한 어하(御河), 사하(沙河), 흑하(黑河), 황하(潢河:황수), 압자하(鴨子河), 타로하(他魯河), 낭하(狼河), 창이하(蒼耳河), 망자하(輞子河), 여구하(臚朐河), 음량하(陰涼河), 저하(豬河), 원앙호(鴛鴦湖), 흥국혜민호(興國惠民湖), 광제호(廣濟湖), 염락(鹽濼), 백구락(百狗濼), 대신정(大神淀), 마우산(馬盂山), 토아산(兔兒山), 야작산(野鵲山), 염산(鹽山), 착산(鑿山), 송산(松山), 평지송림(平地松林), 대부산(大斧山), 열산(列山), 굴렬산(屈劣山), 늑득산(勒得山)이 있다.

  [늑득산(勒得山)은] 당나라가 대하씨(大賀氏)를 늑득왕(勒得王)으로 봉한 곳이며 [늑득왕의] 묘가 이곳에 있다.

  호수는 36,500호이고 관장하는 군(軍), 부(府), 주(州), 성(城)은 25개이며 거느린 현(縣)은 10개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 중국 역사학자들은 내몽골 파림좌기(巴林左旗)를 요나라의 상경임황부라 하고 있고, 우리나라의 많은 역사연구자들도 그러한 중국의 주장을 세밀히 검토해보지도 않고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는 매우 잘못 된 것이라 여겨진다. 

  요사지리지를 보면, 송 진종(真宗) 대중상부(大中祥符) 9년에 쓰여졌다는 설영기(薛映記)를 인용하고 있는데, 그 기록 속에 요나라 상경임황부와 중경대정부의 위치를 확인해 볼 수 있는 내용이 들어 있다. 

 

  기록을 보면,

 “중경에서 정북으로 80리를 가면 송산관(松山館)에 이르고,

  70리를 가면 숭신관(崇信館)에 이르고,

  90리를 가면 광녕관(廣寧館)에 이르며,

  50리를 가면 요가채관(姚家寨館)에 이르고,

  50리를 가면 함녕관(咸寧館)에 이르며,

  30리를 가면 황수석교(潢水石橋)를 건너는데, 인근에 요주(饒州)가 있으니 일찍이 당나라가 거란(契丹)에 두었던 요락주(饒樂州)였고 지금은 발해 사람들이 그곳에 거주한다.

  황수석교(潢水石橋)에서 50리를 가면 보화관(保和館)이며,

  흑수하(黑水河)를 건너 70리를 가면 선화관(宣化館)이고, 50리를 가면 장태관(長泰館)이다.

  장태관 서쪽 20리에 절과 민가들이 있으니 바로 조주(祖州)이다.

 

 다시 장태관(長泰館)에서 40리를 가면 임황부(臨潢府)에 이른다.

  숭신관(崇信館)을 지나면서부터는 이전 거란의 옛 지경이며,그 남쪽은 해(奚)땅이다.

  서문으로 들어가는데 그 문을 금덕(金德)이라 부르며 안에는 임황관(臨潢館)이 있고, 자성(子城)의 동문은 순양(順陽)이다.

  북으로 가면 경복문(景福門)에 이르며, 다시 승천문(承天門)에 이르는데 안에는 소덕전、선정전의 두 궁전과 더불어 현려(峴廬)가 있는데 모두 동향으로 되어있다.

  임황(臨潢) 서북 2백여리에 양정(涼淀)이라 부르는 곳이 만두산(饅頭山) 남쪽에 있으며 피서지이다.

  풍초가 많고 키 높이 정도의 깊이로서 얼음이 단단하게 언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요 중경대정부에서 북쪽으로 490리에 상경임황부가 위치했음을 알 수 있고, 임황서북 2백여리에는 양정과 만두산이라는 호수와 산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 태조 야율아보기는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고는 그 지역을 옛부터 요라고 불렀기 때문에  국호를 “요(遼)”라 정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고, 황수(潢水)가 도읍 상경을 휘감고 흐르기 때문에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라 불렀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옛 요수(遼水)에 대하여, 수경에는 “대요수는 장성 밖 백평산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장성 안으로 들어와 요동 양평현 서쪽을 지나고 또 동남쪽으로 방현 서쪽을 지나고, 또 동쪽으로 안시현 서남쪽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 또 원토 고구려현에 요산이 있는데, 소요수가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흘러 요대현에 이르러 대요수로 들어간다(大遼水出塞外衛白平山 東南入塞 過遼東襄平縣西 又東南過房縣西 又東過安市縣西南 入於海 又元菟高句麗縣有遼山 小遼水所出 西南至遼隊縣 入於大遼水也)”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요수라는 의미가 요 지역을 흐르는 강이라는 의미이고 요동양평현을 지난다고 했으니 요수는 옛 요동성을 지나고 안시성 남쪽을 지나 요택으로 흘러드는 강이 아닌가 싶다.

  지금  중국에서 요 상경임황부라 하고 있는 파림좌기는 요나라의 상경임황부가 아니라 사실은 발해의 상경용천부로 비정되는 곳이다.    

  따라서 지금 파림좌기에 있는 요상경유지(遼上京遺址)라 하는 큰 성터는 몇 십년전까지만 해도 고려성(高麗城)이라 불리우던 곳으로서 사실은 발해 상경성터일 것이고, 따라서 그곳에 있는 요 태조 야율아보기의 능이라는 조릉(祖陵) 역시 발해왕릉일 가능성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