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백제의 한성(漢城)은 한곳이 아니라 남한성과 북한성이 따로 있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한성(漢城)”을 “백제의 5백년 도읍지”라 인식하고 있는데, 그것이 과연 역사적 진실인 것일까?
백제의 온조왕은 기원전 18년에 위례성(하남위례성)에 도읍하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했다가 기원전 5년에 도읍을 한수의 남쪽(필자주 : 한수의 하류로 옮겼다고 했어야 정확한 표현이었다) 남한성으로 옮기게 된다.
☆ 백제 건국설화를 보면, 온조왕은 미추홀로 가서 나라를 세웠던 형인 비류왕이 죽자 그 신하들과 백성들을 십제에 귀속시키고 미추홀의 백성들이 즐겁게 따랐다 하여 국호를 백제로 바꾸었다고 전하는데, 아마 비류왕과 온조왕은 쌍둥이 형제였던 듯 하다.
이때 온조왕이 도읍을 옮기게 된 이유는 그가 전해인 기원전 6년에 신하들에게 한 말이 기록으로 전하기 때문에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3년(B.C.6) 조를 보면, “봄 2월에 왕도에서 노파가 변하여 남자가 되었다. 호랑이 다섯 마리가 성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죽으니 나이가 61세였다.
여름5월 왕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서 변경을 침공하기 때문에 평안한 날이 적고, 요즈음 요상한 일이 자주 나타나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사태가 불안하니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나가서 한수 남쪽(필자주 : 한수 하류를 의미)을 순행했는데, 토양이 비옥함을 보았다. 그곳을 도읍으로 정하여 영구히 평안함을 도모하고자 한다’ 하였다.
☆ 온조왕이 어제는 한수 남쪽(한수 하류)에 가서 땅을 둘러보았고, 오늘은 위례성으로 돌아와 신하들과 회의를 하고 있으니 위례성에서 한수 남쪽 지역은 하루에 왕복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음을 알 수 있고, 이때 온조왕은 동쪽의 낙랑과 북쪽 말갈의 침공을 피하기 위해 남쪽으로 도읍을 옮겼다.
가을7월 한산(漢山) 아래에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8월 마한에 사신을 보내 도읍을 옮긴다는 것을 알리고, 나라의 강역을 획정하였는데,
북쪽으로는 패하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웅천을 한계로 하였고,
서쪽으로는 대해에 닿았고,
동쪽으로는 주양까지로 하였다.
9월 성을 쌓고 대궐을 세웠다.
14년(B.C.5) 봄 정월에 도읍을 옮겼다. 2월 왕이 부락을 순행하면서 백성들을 위무하고 농사를 장려하였다. 7월 한강 서북방에 성을 쌓고 그곳에 “한성 (漢城)”백성들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
15년(B.C.4) 봄 정월 궁실을 준공하였는데,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았다.
17년(B.C.3) 봄에 낙랑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불태웠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건국지였던 위례성이 낙랑과 말갈의 침공에 취약하고, 정신적 지주였을 왕의 어머니인 태후 소서노의 죽음과 여러 가지 불길한 징조로 인한 민심의 동요를 무마하기 위해 궁실이 채 완공되기도 전에 급히 도읍을 옮겼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리고는 13대 근초고왕 26년(A.D.371)에 이르러 “도읍을 한산(한성)으로 옮겼다(移都漢山)”는 기록이 나타나고, 다시 개로왕 21년인 475년에 백제가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을 받아 도읍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잡혀죽자 문주왕이 급히 왕위에 올라 웅진(熊津)으로 도읍을 옮긴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온조왕이 기원전 5년에 한수의 남쪽(삼국유사에는 ‘병진년에 한산[漢山]으로 도읍을 옮기니 지금의 광주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으로 옮긴 도읍이 “한성(漢城)”이었고, 문주왕이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475년까지 한성에서 480년간 도읍하고 있었다고 이해함으로써 한성을 백제 500년 도읍지라 하고 있다.
그렇지만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분명하게 근초고왕 26년인 371년에 “도읍을 한산(漢山: 한성)으로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고, 삼국유사에는 “신미년에 도읍을 북한산(北漢山)으로 옮겼다” 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 한성부 조에는, 한성부가 본래는 고구려의 북한산군이었고, 근초고왕이 남한산으로부터 옮겨 도읍하였다고 기록함으로써 북한산이 곧 한성부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기록대로라면 근초고왕이 한산에서 북한산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말이 되고, 삼국사기의 기록대로라면 근초고왕이 한수의 남쪽(하류)에서 한산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말이 되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남한산에서 북한산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말이 되어 매우 헷갈린다.
그러다보니 이해의 수준이나 해석여하에 따라 여러 각도로의 추정이 가능하여 지금까지도 학자들 간에 설왕설래 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기록에 나타나는 “남한산”을 한산의 남쪽이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북한산”을 한산의 북쪽으로 해석하며, 온조왕이 기원전 5년에 위례성에서 한수의 남쪽(하류)으로 옮겼다는 곳이 사실은 한산의 남쪽 즉 한수 하류에 위치한 남한성(한산의 남쪽이라는 의미로서 성을 쌓고 남한산성 또는 남한성이라 했을 것이다)이었고, 근초고왕이 다시 남한성에서 북쪽의 한성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보면, 백제에 “한산(漢山)”이라는 매우 큰 산이 있었다고 할 수 있고 그 산의 남쪽을 남한산, 그 산의 북쪽을 북한산으로 불렀을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그런데 “한산(漢山)”이라는 하나의 산을 기준으로 역사서를 쓰다보니 어느 때는 한산, 또 어느 때는 한산의 남쪽과 북쪽이라는 의미로 남한산, 북한산으로 표기하기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한성부 군명 조를 보면, “남경, 한양, 남평양, 북한산, 양주, 광릉”이라 기록되어 있어, 조선시대의 한성부가 고구려의 남평양, 백제의 북한산, 고려 때의 한양, 남경이었음을 알 수 있고,
건치연혁 조를 보면,
“본래 고구려의 북한산군이었는데, 백제의 온조왕이 빼앗아 성을 쌓았으며, 근초고왕이 남한산으로부터 옮겨 도읍하였다. 1백5년을 지나 개로왕 때에 와서 고구려의 장수왕이 와서 도성을 포위하니 개로왕이 달아나다가 피살되고, 아들(필자주 : 사실은 동복동생이었다) 문주왕이 도읍을 웅진으로 옮겼다” 라고 기록하고 있으니 백제에 한산이라는 산이 있었고, 그 산의 북쪽에 북한산, 그 산의 남쪽에 남한산이 위치 했었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의 해석은 아주 간단해지고 명확해진다.
즉 온조왕은 기원전 5년에 이르러 동쪽의 낙랑과 북쪽 말갈의 침공으로부터 취약한 위례성으로부터 남쪽으로 내려와 한수의 하류에 위치한 남한성(남한산)으로 옮겨 근초고왕 26년인 371년까지 376년간 도읍하고 있었는데, 근초고왕이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도읍을 남한성의 북쪽인 한성(북한성)으로 옮겨 개로왕 21년인 475년까지 105년간 도읍하였고, 문주왕이 다시 웅진(475-538)으로, 성왕이 또 다시 사비(538-660)로 도읍을 옮겨 결국 그곳 사비에서 백제 678년 사직을 문 닫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두 한성 즉 남한성에 도읍했던 기간 376년간과 한성(북한성)에 도읍했던 기간 105년간을 합하면 480년간이 되지만, 남한성은 후일 광주로 지명이 바뀌게 되고, 북한성은 한성으로 지명이 바뀌게 되는데, 이 각각의 두 지역을 “한성백제시기”라고 하면서 하나로 묶어 500년 도읍지라 할 수 있는 것인지 선뜻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엄밀하게 따져볼 때 한성(북한성)은 백제의 100년(실제는 105년간) 도읍지라 해야 옳고, 광주(남한성)는 백제의 400년(실제는 376년간) 도읍지라 불러야 옳은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