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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치우천왕과 황제헌원이 다투었던 탁록벌판의 원래 위치 - 최초주장

윤여동 2011. 1. 3. 05:12

 윤여동설 - 치우천왕과 황제헌원이 다투었던 탁록벌판의 원래 위치를 찾았다 - 최초주장

 

 

[1번은 현재 중국 사람들이 지명을 이동시켜 만들어 놓은 탁록이고, 2번은 치우천왕과 황제헌원이 다툰 진짜 탁록벌판이다]

 

 

  원동중의 삼성기 신시역대기는 14세 자오지(慈烏支)환웅을 치우천왕이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너무도 많은 세월이 흘러 그의 생몰연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당시 치우천왕이 황제헌원과 탁록의 벌판에서 국운을 건 전쟁을 했었다는 이야기는 설화가 되어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전해지고는 있다.

  그러나 그 탁록벌판이라는 곳이 정확하게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대명일통지 순천부 조를 보면,

  탁주(涿州)가 순천부 서남 140리에 있는데, 춘추전국 때는 연나라의 탁읍이었고, 진(秦)나라 때는 상곡군이 되었으며, 한(漢)나라 때는 탁군이 되었다가 조위 때는 범양군으로 바뀌었고, 진(晉)나라 때는 범양국이 되었다가, 후위 때 다시 범양군으로 만들었고 수나라 때 탁군이 되었다가 당나라 때 군을 폐하고 범양현으로 만들어 유주에 속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후에도 탁주, 탁수군, 범양현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탁주는 지금의 북경 서남쪽에 위치한다.    

  한서 권28하 지리지 제8하를 보면,

  “상곡군(上谷郡)은 진나라가 설치했는데 왕망은 삭조(朔調)라 했다.

  호수는 36,008호이고 인구는 117,762명이며, 현이 15개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 15개 영현 중에 탁록현이 있다.

  다시 탁록현에 관한 기록을 보면,

  “탁록을 왕망은 포륙이라 했다. 응소는 황제와 치우가 탁록의 벌판에서 전쟁을 한 곳이라 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대명일통지에서 탁군이 상곡군이 되었다는 기록과 일치하고, 그 영현에 탁록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중국에는 북경 서북쪽 관청수고 부근에 "탁록(涿鹿)"이라는 곳이 있고, 그곳을 치우천왕과 황제헌원이 다투었던 탁록벌판이라 하면서 삼조당이라는 것을 세워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원래 지금의 북경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었던 탁군과 탁록벌판을 엉뚱한 곳으로 옮겨 역사를 해석하고 있는 꼴이니 제대로된 해석을 할 수 없음은 자명한 이치이다.

  

  그렇다면 치우천왕과 황제헌원은 왜 이 탁록의 벌판에서 국운을 건 전쟁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일까?

  이때 치우천왕의 강역은 요수인 지금의 영정하 동북쪽과 그 북쪽인 내몽골 땅을 차지하고 있었고, 황제헌원의 강역은 지금의 영정하 서남쪽 땅을 차지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다가 치우천왕이 요수를 건너 서남쪽으로 침공하자 전쟁이 시작되었을 것이인데 바로 그곳이 탁록벌판이었던 것이다.  

   결국 치우천왕은 빼앗은 그 땅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고, 황제헌원은 그 땅을 되찾으려 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탁록벌판을 치우천왕이 영원히 차지하게 되면 평원을 따라 남쪽으로 멀리 나아갈 수 있고, 황제헌원이 차지하게 되면 요수를 건너 요동이 위험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치우천왕과 황제헌원은 요충지 중의 요충지인 탁록벌판을 차지하기 위하여 천만명 이상의 군사를 동원하여 10년 동안 무려 73회의 전투를 하였고, 수백만명의 전사자가 발생할 정도로 치열하게 다투게 된다.  

  가히 국운을 건 전쟁이었다고 할 것인데, 초반에는 치우천왕이 이끄는 군사들이 승전하여 탁록벌판을 차지했으나 결국에는 요서지역에 위치하고 있던 고죽국 부근이 두 나라간의 국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랬다가 고조선 말기 연 소왕 때의 장군인 진개의 침공을 받아 무려 1천여리(또는 2천여리)의 땅을 빼앗기게 되고, 연나라에서는 원래 연나라 땅에 상곡군, 어양군, 우북평군을 설치하고, 고조선의 땅을 빼앗은 곳에 요서군, 요동군을 설치하게 되어 고조선의 세력이 약화되었고 고조선이 결국에는 분열되고 말았다고 생각된다.

  이때 연나라는 고조선의 속국이었을 것이기 때문에 연나라의 진개가 동호(고조선)에서 볼모생활을 했다는 기록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역현 부근에 연나라의 도읍 계(薊)가 위치하고 있었을 것인데, 사람들은 그곳이 연나라의 도읍이었으므로 연경(燕京)이라고도 부르게 되는 것이다.

   연 소왕이전에는 북경을 지나 지금의 하북성 역현 부근까지가 고조선의 강역이었음을 알아야 하고, 후대 석경당이 거란에게 떼어주었던 연운 16주가 원래는 고조선의 강역이었던 곳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후진(後晋)의 석경당은 연운 16주가 중국 땅이 아니라 원래는 고조선의 땅이었기 때문에 거란에게 떼어 준다해도 별 문제가 없다고 본 것이고, 거란은 그 땅이 고조선의 옛 땅이었음을 알고 있었고 석경당이 군사지원의 댓가로 그 땅을 주겠다고 하자 흔쾌히 동의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보면 거란도 옛 고조선의 후예임에 틀림없고, 결과적으로 거란은 그 땅을 차지함으로써 대제국으로 발돋움했던 것이고, 땅을 함부로 떼어준 후진은 바로 멸망하고 마는 것이다.

  석경당이 요충지 중의 요충지 탁록벌판을 함부로 떼어준 댓가였고, 그 후에도 중국 세력들은 그 연운 16주 때문에 골머리를 앓게 되고, 결국에는 온 중국이 북방 민족들에게 정복당하게 된다.

  그 연운 16주 땅을 기반으로 거란족이 세운 나라인 요나라가 대륙의 패자가 되자 송나라는 비단과 은을 바치며 평화를 구걸했고, 요나라를 이어 일어난 여진족의 금나라 역시 대륙의 패자가 되어 북송을 멸망시켰으며, 금나라를 이어 일어난 몽골족의 원나라는 온 중국을 차지했고, 여진족의 청나라도 온 중국을 차지할 수 있었다.

  지금의 중화민국은 광동성 사람인 손문이 세운 나라이니 그는 남만족 사람이다.

  현재의 중국은 남만족의 지배를 받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다음에 중국을 차지할 민족은 과연 어느 민족인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