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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백제 17대 아신왕의 이름은 부여휘(扶餘暉) - 최초주장

윤여동 2011. 4. 8. 23:31

윤여동설 - 백제 17대 아신왕의 이름은 부여휘(扶餘暉) - 최초주장

 

  진서(晉書) 권9 제기 제9 효무제 태원 11년(A.D.386) 4월 조를 보면,

  “백제왕세자 "여휘(餘暉)"를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으로 삼았다(以百濟王世子餘暉爲使持節都督鎭東將軍百濟王)”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백제왕실의 본래 성씨는 부여씨였으므로 사실은 “부여휘(扶餘暉)”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서에 기록되어 있는 이 백제왕세자 "부여휘"는 과연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15대 침류왕이 385년 11월에 죽자 그 뒤를 이어 침류왕의 동생인 16대 진사왕이 왕위에 올랐고, 진사왕이 재위 8년인 392년 11월에 죽은 뒤에야 침류왕의 장자인 아신왕이 왕위에 오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서기 386년은 16대 진사왕 재위 2년에 해당하는 해가 되므로 진서 태원 11년 4월 조의 “백제왕세자”라는 기록을 진사왕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진사왕은 침류왕의 동생으로서 태자로 봉해졌던 사실이 없다.

  그러므로 진서 태원 11년 조 기록 속의 “백제왕세자”는 침류왕의 장자였고 태자로 봉해졌던 아신왕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을 것이고, 아신왕의 진짜 이름이 “부여휘(扶餘暉)”였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인 것이다.

  앞서,

  침류왕이 죽었을 때 태자였던 부여휘(후일의 아신왕)는 약10세 정도의 어린아이였다. 그렇지만 백제왕실에서는 침류왕의 부고를 전하고 태자의 왕위계승을 국제적으로 공인받기 위한 작위를 받기 위하여 동진에 사신을 급파하게 된다.

  그런데 사신이 동진을 향하여 출발한 후 사태가 급변하여 침류왕의 동생인 진사가 왕위를 찬탈하는 불상사가 발생하게 되는데, 명분은 태자가 너무 어려 국정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이 왕위에 올라야 한다는 것이었고, 이가 곧 백제 16대 진사왕이었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진사왕 조를 보면, “진사왕은 근구수왕의 둘째아들이오 침류왕의 동생이다. 그의 사람됨이 억세고 용감하며, 총명하고 슬기로웠으며 지략이 많았다. 침류왕이 죽었을 때 태자가 어렸기 때문에 태자의 숙부 진사가 왕위에 올랐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일본서기 신공황후 섭정 65년 조를 보면, "침류왕이 죽었다. 왕자 아화(阿花: 아신왕)가 나이가 어려 숙부인 진사가 왕위를 빼앗아 왕이 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진사왕이 왕위를 찬탈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부여휘는 침류왕의 태자였음에도 그 아버지 침류왕의 뒤를 이어 바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밀리고 말았다.

  그런데 동진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알지 못하고 태자인 부여휘를 “사지절 도독 진동장군 백제왕”으로 봉하고 작위를 직접 전달하기 위하여 사신을 보내오게 된다.

 

☆ “사지절 도독 진동장군 백제왕”이라는 작위에서 “사지절(使持節)”이라는 의미는 “황제의 부절을 소지한 사신”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때 동진에서 백제에 직접 황제의 부절을 소지한 사신을 파견하여 백제의 태자에게 백제왕의 작위를 전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동진의 사신이 백제에 도착해보니 태자가 아닌 태자의 숙부인 진사가 왕위에 올라 있었기 때문에 동진의 사신은 진사를 왕으로 인정할 수 없다하고는 태자인 부여휘에게 백제왕의 작위를 주고는 돌아가게 된다.

  백제에 두 왕이 있게 된 셈이었다. 

  그러자 당시 백제의 왕위에 올라 있던 진사왕과 동진과는 불편한 관계가 되었고, 진사왕은 동진에 조공을 하지 않게 된다.

  진사왕 대에 동진에 조공한 기록이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이고, 이때 백제는 진사왕을 추종하는 세력과 태자인 부여휘를 추종하는 세력으로 나누어지게 되어 정치는 어지러워졌고, 주변국의 침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진사왕은 재위 8년인 서기 392년 11월에 태자를 추종하는 세력에 의해 구원행궁에서 시해당하고 침류왕의 태자로서 앞서 동진으로부터 백제왕의 작위를 받았던 부여휘가 뒤늦게 18세쯤의 나이에 왕위에 오르는데, 이가 곧 백제 17대 아신왕이다.

  따라서 진서 기록 속의 “백제 왕세자 부여휘(扶餘暉)”는 침류왕의 장자로서 태자로 봉해져 있었으나 숙부인 진사에게 왕위를 빼앗겼던 “백제 아신왕”의 이름인 것이다. 

 

☆ 일본서기 응신천황 3년 조를 보면, “이해 백제의 진사왕이 천황에게 무례하였다. 그리하여 기각숙미, 우전시대숙미, 석천숙미, 목토숙미를 보내 그 무례함을 책망하였다. 이 때문에 백제국은 진사왕을 죽여 사죄하였다. 기각숙미 등은 아화(아신왕)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진사왕이 아신왕의 측근들에 의해 시해 당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아신왕은 왕위에 오르자 진사왕 말기 고구려에게 빼앗긴 관미성 10여을 탈환하려 시도하게 되고,

  결국 396년 광개토태왕의 침공을 받아 도읍인 한성이 포위되어 함락직전에 이르자 광개토태왕 앞에 남녀 1천명, 세포 1천필을 바치며 항복하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노객이 되어 따르겠습니다"라고 맹세해야만 했고, 58개성, 7백개촌을 빼앗겨야 했으며, 왕의 동생과 대신 10여명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야 했다.

  아신왕은 고구려 광개토태왕과 동시대에 태어나 그 빛을 발할 수 없었던 비운의 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