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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진시황이 올랐던 진짜 갈석산(碣石山)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 2011. 8. 16. 12:29

윤여동설 - 천년의 비밀 진시황이 올랐던 진짜 갈석산(碣石山)의 위치 - 최초공개

 

 

 

  진시황은 평생에 다섯번 순행을 하였는데, 그 중 네 번째가 기원전 215년에 이루어진 진나라의 동북지방 순행이었다.

  이때 진시황은 함양을 출발하여 동북쪽으로 향하여 한단에 도착한 후 북쪽으로 올라가 갈석산(碣石山)에 올랐고, 다시 서북쪽으로 향하여 요서를 둘러보고 다시 서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황하를 건너 오르도스 지역을 통과하여 남쪽으로 향하여 함양으로 되돌아왔다.

  그런데 이 순행이 우리 역사에 있어 중요한 것은 천년동안 그 위치를 찾지 못하고 있는 갈석산의 위치를 찾을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많은 옛 사서들은 “상산 구문현에 갈석산이 있다(常山 九門縣 有碣石山)”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고대의 상산이란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당현에 있는 대무산(신선산, 1,898m)을 말하는 것으로서 항산을 상산이라 기록한 것은 한 문제의 이름이 유항(劉恒)이었기 때문에 그 이름자 항(恒)을 피해서 상산이라 기록한 것이다. 

 

 

 

 

       [고 북악항산 : 현 하북성 보정시 당현 대무산(신선산) 입구]

 

  그런데 옛 지도들을 보면 갈석(碣石)을 항산(상산)의 동쪽 또는 동북쪽 가까이에 그려 놓고 있다.

  이는 갈석산을 항산(상산)의 동쪽 또는 동북쪽 가까이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이 되는 것인데,  옛 항산인 지금 대무산(신선산)의 동북쪽에 보정시 수성진(遂城鎭)이 있다.

   지금의 수성진이 옛 사서 기록 속의 "낙랑 수성현(樂浪遂城縣)"이라면 갈석산은 바로 그 부근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이된다.  

 

  

  위 무제 조조도 갈석산에 올랐을 때 “觀滄海(창해를 바라보다)”라는 시를 읊었다고 하고, 당 태종도 갈석산에 올라 “春日觀海(봄날에 바다를 바라보다)”라는 시를 읊었다고 하는 바로 그 갈석산 말이다. 

  사기 권2 하본기 제2를 보면, 조이피복협우갈석(鳥夷皮服夾右碣石)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까지 이 기록을 이해하는데 애를 먹었다.

  그런데 진짜 갈석산의 대강의 위치를 찾고보니 이 기록을 무리없이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기록 속에서 말하는 조이(鳥夷)는 고조선을 말하는 것으로서 옛 지도상에는 갈석산의 동쪽 또는 동북쪽에 도이(島夷)로 표시되어 있는데, 지금의 북경 부근을 표시한 것 같다.

  따라서 이들이 지금의 북경 부근으로부터 장안(서안)까지 가려면 태행산맥의 동쪽 방향에 있는 해변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와 황하구에서 황하를 타고 서쪽으로 가야만 도착할 수 있다.(필자주 : 옛날의 황하구는 역하 또는 구하라고 불렀다고 한다)

   따라서 위 조이피복협우갈석(鳥夷皮服夾右碣石)이라는 말은 조이(도이)가 장안을 갈 때 갈석을 오른쪽으로 끼고 간다는 말이었다. 즉 조이가 오른쪽(서쪽방향)에 있는 갈석산을 바라보며 항해를 하여야 중국의 장안에 갈 수 있다는 말임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전국책 권제29 연1에서 소진이 연 문후에게 말한 “南有碣石鴈門之饒 北有棗栗之利(연나라의 남쪽으로는 갈석과 안문의 풍요로움이 있고, 북쪽으로는 대추, 밤의 이로움이 있다)”고 말한 의미를 알 수 있게 되어 연나라의 강역을 가늠해 볼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진(西晉) 태강지리지의 “낙랑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된 곳(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 진서지리지의 “낙랑군 수성현은 진나라가 쌓은 장성이 시작된 곳(樂浪郡遂城縣秦築長城之所起)”이라는 기록은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수성진 부근을 말하는 것이었다.

  고대의 갈석산은 바로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수성진 부근에서 찾아야 했던 것이다. 

  지금의 낭아산(狼牙山)이 바로 진시황이 올랐던 진짜 갈석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