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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백제 아신왕과 진사왕은 무슨 관계였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 2011. 9. 21. 10:27

 

윤여동설 - 백제 아신왕과 진사왕은 무슨 관계였을까? - 최초주장

 

 

 

 

 

[백제 16대 진사왕 2년(A.D.386)에 국내의 15세 이상되는 백성들을 동원하여 청목령으로부터 북쪽으로는 팔곤성까지, 서쪽으로는 바다까지 쌓았다는 무너진 백제장성]

 

일본서기를 보면,

신공황후 섭정 55년 백제의 초고왕(필자주 : 13대 근초고왕의 오기이다)이 죽었다.

56년 백제의 왕자 귀수(필자주 : 14대 근구수왕의 오기이다)가 왕이 되었다.

64년 백제국의 귀수왕이 죽었다. 왕자 침류왕(15대  침류왕)이 왕이 되었다.

65년 침류왕이 죽었다. 왕자 아화(후일의 17대 아신왕)가 나이가 어려 숙부 진사(16대 진사왕)가 빼앗아 왕이 되었다.

응신천황 3년 백제의 진사왕이 왕위에 올라 귀국(貴國)의 천황에게 무례하였다. 그래서 기각숙미, 우전시대숙미, 석천숙미, 목토숙미를 보내 그 무례함을 책망하였다. 이 때문에 백제국은 진사왕을 죽여 사죄하였다. 기각숙미 등은 아화(아신왕)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

8년 춘삼월 백제인이 내조하였다.[백제기에 이르기를 아화가 왕이 되었다. (진사왕이) 귀국에 무례하였기 때문에 우리의 침미다례(枕彌多禮) 및 현남(峴南), 지침(支侵), 곡나(谷那), 동한(東韓)의 땅을 빼앗겼다. 이 때문에 직지(후일의 18대 전지왕)를 천조에 보내어 선왕(진사왕)이 잘못한 우호를 다시 약속했다고 하였다] 

16년 이해 백제의 아화왕(17대 아신왕)이 죽었다. 천황은 직지왕(18대 전지왕)을 불러 “그대는 본국에 돌아가 왕위를 계승하시오” 라고 말하고 동한(東韓)의 땅을 주어 보냈다.

25년 백제의 직지왕이 죽었다. 그 아들 구이신(19대 구이신왕)이 왕이 되었다. 왕이 나이 어렸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백제 13대 근초고왕(필자주 : 일본서기에는 초고왕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근초고왕의 오기이다)

14대 근구수왕(필자주 : 일본서기에는 귀수왕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귀수(貴須)는 6대 구수왕의 이름이고, 근구수왕의 이름은 수(須)로서 근구수왕의 오기이다)

15대 침류왕(근구수왕의 장자이다)

 16대 진사왕(침류왕의 동생이다)

17대 아신왕(침류왕의 장자이다. 필자주 : 일본서기는 아화라고 했는데, 이는 화(華)와 신(莘)자가 비슷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18대 전지왕(아신왕의 장자이다. 필자주 : 일본서기는 직지라 했고,중국 사서에는 이름이 영이라 했다)

19대 구이신왕(전지왕의 장자이다)까지의 왕위 계승에 대하여 알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진사왕과 아신왕과의 관계에 대하여 숙부인 진사왕이 아신왕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아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은 역사적 사실인 것일까?

  삼국사기 백제본기 진사왕 조를 보면, “진사왕은 근구수왕의 둘째 아들이요 침류왕의 아우이다. 그의 사람됨이 강하고 용감하며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지략이 많았다. 침류왕이 죽었을 때 태자가 어렸기 때문에 태자의 숙부인 진사가 왕위에 올랐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일본서기의 기록처럼 숙부인 진사왕이 나이어린 조카인 아신왕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았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조선시대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아 왕위에 오른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왕위를 빼앗긴 백제 아신왕은 왕위를 빼앗기고 가만히 있었을까?

아마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하든 그 왕위를 되찾으려고 노력했을 것인데, 삼국사기에는 진사왕이 재위 8년 11월에 구원(狗原 : 狗川이 흐르는 곳에 있는 벌판으로 비정된다)이라는 곳으로 사냥을 갔다가 그곳 구원행궁에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일본서기는 또 진사왕의 죽음에 대하여 진사왕이 왕위에 오른 후 귀국(왜국을 말하는 듯)의 천황에게 무례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백제 사람들이 진사왕을 죽임으로서 사죄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그 뒤를 이어 아신왕이 왕위에 오르는 것이다.

진사왕이 정말로 피살되었을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진사왕이 왕위에 오른 후 왜국의 천황에게 어떠한 행동을 하였는지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이때 백제의 진사왕과 왜국 천황과의 관계가 원만치 않았던 것은 아마 역사적 사실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웃나라인 왜국에서 진사왕이 나이어린 조카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왜국에서는 그를 백제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기 때문이고, 그러자 진사왕 역시 그러한 왜국에 대하여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갈등을 기회삼아 진사왕이 피살되었을 경우 그를 죽인 세력은 필경 아신왕을 지지하는 세력이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결국 진사왕은 조카인 아신왕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했던 것이고, 8년 후 아신왕이 성장한 후 숙부인 진사왕을 제거하고 왕위를 되찾았던 것이며, 이웃나라인 왜국과의 외교관계를 복원했던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