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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을파소(乙巴素)의 초상을 찾았다고?

윤여동 2011. 11. 25. 20:16

 

윤여동설 - 을파소(乙巴素)의 초상을 찾았다고?

 

 [용문애에 새겨진 사신대사상(捨身大士像)으로서 고구려 국상 을파소의 모습으로 추정된다]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를 보면,

“책성에 태조무열제의 기공비가 있고,

동압록의 황성에 광개토경대훈적비가 있다.

안주 청천강변에 을지문덕의 석상이 있고,

오소리강(烏蘇里江) 밖에 연개소문의 송덕비가 있다.

평양 모란봉 중간 기슭에 동천제의 조천석이 있고,

삭주 거문산 서쪽 기슭에 을파소의 묘가 있으며,

운산 구봉산에 연개소문의 묘가 있다.

(柵城有太祖武烈帝紀功碑

東鴨綠之皇城有廣開土境大勳蹟碑

安州淸川江岸上有乙支文德石像

烏蘇里江外有淵蓋蘇文頌德

平壤牡丹峰中麓有東川帝朝天石

朔州巨門山西麓有乙巴素墓

雲山之九峰山有淵蓋蘇文墓)”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 : 운주 용문애]                                                           

                                                               [위 : 용문애에 새겨진 삭방병장 각석]

   

 [위 : 사신대사상]

 

 

  [위 : 호국사]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을파소는 유리왕 때의 대신이었던 을소의 손자로서 원래 서압록곡 좌물촌이라는 곳에서 농사를 짓고 살고 있었다.

  그런데 9대 고국천왕이 널리 인재를 구하자 안류라는 사람이 천거하여 그를 국상으로 삼게 되었고, 그가 지성으로 국사를 살피고, 정치와 교화를 밝게 하며, 상벌을 신중하게 집행하니 백성들이 편안해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10대 산상왕 7년까지 무려 13년동안 고구려의 국상으로서 재임하다가 죽었고 그가 죽었을 때 백성들이 통곡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그의 무덤을 어디에 조성했는지는 알 수 없었는데, 그의 무덤 위치에 관한 기록이 환단고기 태백일사에 들어 있는 것이다. 

  삭주 거문산 서쪽 능선에 을파소의 묘가 있다고................

 

  그렇다면 삭주 거문산이 어딘지를 찾으면 을파소묘의 위치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원래 "삭(朔)"이라는 말은 북쪽을 나타내는 말이다.

  삭풍(朔風)은 북쪽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말하는 것이 그 예인데, 압록수는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을 지나는 백하(白河)로 비정되며, 삭주 거문산에 그의 묘가 조성되었다고 하였으니 그의 무덤은 적성의 북쪽 지방에 조성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적성에서 북쪽으로 약 20km 지점에 운주(雲州)라는 곳이 있고, 그 북쪽에 용문애(龍門崖)라고 하는 거대한 바위가 있다.  

  그곳을 지나기 위해서는 좁은 협곡인 용문애 앞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용문(龍門)이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용문(龍門)과 거문(巨門)은 모두 커다란 관문을 말하는 것으로서 동일한 의미이다.

  그런데 그 용문애에 "사신대사(捨身大士)상"이 조각되어 있는 것이다.

  사신이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쳤다는 의미이고, 대사는 큰 선비라는 뜻인데, 생각해보면 혹시 그 사신대사가 고구려의 명재상 을파소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필자의 추측이 맞다면 을파소는 원래 지금의 적성 운주 부근에서 농사를 짓고 살다가 안류의 추천으로 고구려의 국상(지금의 국무총리)이 되어 정치를 잘 했고, 죽은 후에는 다시 고향에 돌아와 묻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그 지방 사람들이 그곳 출신으로서 국상에까지 올랐던 을파소를 기리기 위해 그곳의 커다란 바위에 을파소의 상을 새겼던 것이 아닌가 싶고, 그 가까이에 있는 호국사라는 절도 후세에 이르러 을파소의 극락왕생을 위해 지어진 원찰일 가능성이 많아 보인다.

  따라서 삭주 거문산에 있다는 을파소의 묘는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운주향 용문애 부근에 조성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