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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백제 초기 낙랑 우두산성(牛頭山城)의 위치를 공개한다 - 최초공개

윤여동 2011. 12. 10. 09:36

윤여동설 - 백제 초기 낙랑 우두산성(牛頭山城)의 위치를 공개한다 - 최초공개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18년(B.C.1) 조를 보면, “11월 왕이 낙랑의 우두산성(牛頭山城)을 습격하려고 구곡(臼谷)까지 갔다가 큰 눈을 만나 돌아오고 말았다” 라고 하면서 우리 삼국역사서에 우두산성(우수산성)이 등장하고,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원도 춘천도호부 건치연혁을 보면,

“본래 맥국인데 신라의 선덕여왕 6년에 우수주(牛首州 : 首는 頭로도 쓴다)로 만들고 군주를 두었다. 문무왕 13년에는 수약주(水若州 : 오근내라고도 하고 수차약이라고도 한다)라고 불렀고, 경덕왕이 삭주(朔州)로 고쳤다가 뒤에 광해주(光海州)로 고쳤다. 고려 태조 23년에 춘주(春州)로 만들었고..............조선 태종 13년에 지금의 이름(春川)으로 고쳐 군으로 만들었다가 15년에 준례에 따라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강원도 춘천의 옛 이름이 우수주(우두주)였음을 알게 한다.

 

그리고 같은 책 춘천도호부 산천 조를 보면, “우두산(牛頭山) : 부의 북쪽 13리에 있다”라고 간단하게만 언급되어 있으나, 바로 이 우두산(소머리산)이라는 산에서 우수주(우두주)라는 지명이 유래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 백제 온조왕 이후의 우두주(우수주)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해이사금 27년(A.D.222) 조의, “10월 백제군사가 우두주(牛頭州)를 침공해 오니 이벌찬 충훤이 군사를 거느리고 막다가 웅곡에서 적에게 패하여 단신으로 돌아오니 그를 진주로 강등시키고, 연진을 이벌찬으로 삼아 군사사무를 겸하여 보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고,

  삼국사기 백제본기 구수왕 9년(A.D.222) 조에도, "겨울 10월 신라의 우두진으로 군사를 보내 민가들을 약탈하였더니 신라 장수 충훤이 군사 5천을 거느리고 웅곡에서 우리 군사를 맞아 싸우다가 크게 패하여 단신으로 도망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신라가 차지하고 있던 우두주를 백제에게 빼앗겼던 것이 아닌가 싶은데,

  신라본기 기림이사금 3년(A.D.300) 조를 보면, “3월 왕이 우두주(牛頭州)에 이르러 태백산에 제사를 지냈다”라는 기록이 있으니 이때 우두주를 신라가 다시 회복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또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8년(A.D.486) 조를 보면, “가을 7월 궁실을 중수하고 우두성(牛頭城)을 쌓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다시 이 우두주를 백제가 신라로부터 빼앗아 성을 고쳐 쌓았음을 알 수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선덕여왕 6년(A.D.637)에 우수주(우두주)를 만들고 군주를 두었다고 하였으니 이때 우두주가 다시 신라의 강역이 되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덕여왕 원년(A.D.647) 조에는 “2월 대아찬 수승을 임명하여 우두주 군주를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고,

  태종무열왕 2년(A.D.655) 조에는 “겨울 10월 우수주에서 흰 사슴을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통일 이후인 효소왕 7년(A.D.698) 조에는 “봄 정월 이찬 체원으로 우두주 총관을 삼았다”는 기록이 있고,

  성덕왕 35년(A.D.736) 조에는 “이찬 윤충, 사인 영술을 보내 평양주와 우두주 두 주의 지세를 살폈다”는 기록이 있으며,

  애장왕 2년(A.D.801) 조에도 “가을 9월 무진주에서 붉은 까마귀를 진상하였고 우두주에서는 흰꿩을 바쳤다”는 기록과 5년(A.D.804) 조의 “우두주 난산현에서 누워 있던 돌이 일어섰다” 라는 기록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우두주(우수주)는 낙랑동부도위에 속해 있어 백제와 낙랑동부도위간 접경역할을 하다가 서기 200년경에 신라가 차지하였고, 그 후 백제와 신라가 요충지인 이 우두주를 놓고 지속적으로 쟁탈전을 벌이다가 결국에는 신라 땅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18년(B.C.1) 조를 보면, “11월 왕이 낙랑 우두산성(牛頭山城)을 습격하려고 구곡(臼谷)까지 갔다가 큰 눈을 만나 돌아오고 말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백제의 온조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낙랑(낙랑동부도위로 추정된다)의 강역에 속해 있던 우두산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구곡(절구곡)이라는 곳까지 갔으나, 마침 많은 눈이 내려 더 이상 전쟁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군사를 돌려 되돌아왔음을 알게 한다.

  백제 건국초기인 이때 우두산성이 낙랑(동부도위)과 백제의 접경지역에 위치하고 있던 성이었을 것인데, 아직도 대륙백제, 대륙신라의 존재를 부정하며 한반도를 중심으로 삼국역사를 해석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 우두산성의 위치를 공개하지 않을 수 없다.

  이거 사실 필자가 매우 고생해서 찾은 곳이므로 공짜로 위치를 공개하면 안되는데.....................ㅎㅎㅎ

 

[위: 우수주(우두주)의 우두산성 추정지]

 

   신라의 우수주(우두주), 고려의 춘주는 한반도의 강원도 춘천을 말하는게 아니라 지금의 중국 요녕성 능원 부근을 말하는 것으로서 백제 초기의 동북 경계가 바로 이 능원 부근이었음이 밝혀졌는데, 그 부근의 지형이 마치 소머리처럼 보이기 때문에 옛부터 그 지방을 우두주(牛頭州 또는 牛首州)라 명명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3년 조를 보면 “나라의 동쪽[에는 신라가 있고, 서쪽]에는 낙랑이 있으며,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변경을 침공하기 때문에 편안한 날이 적다..............도읍을 옮겨야겠다”고 온조왕이 말하고 있는데, 한반도에서는 이 기록을 충족할 수 없으나 필자와 같이 비정하면 기록과 현실이 일치된다.[필자주 : 이때 백제 온조왕은 "나라의 서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으며, 동쪽에는 신라가 있다"고 말했을 것이다.그래야 각 나라들의 위치가 딱 맞아 떨어진다. 따라서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다고 하는 삼국사기 기록은 일부가 누락된 것임에 틀림없다]

 

  사실 우리의 백제와 신라 그리고 가야의 건국지는 한반도가 아니라 발해 북쪽 하북성 당산시, 진황도시, 요녕성 호로도시, 금주시(錦州市) 일원이었고, 그곳에서 멸망했으며, 고려 역시 중심강역이 한반도가 아니었다.

  당나라의 소정방이 13만 군사들과 말을 배에 싣고 파도치는 서해바다를 건너와서 한반도 남부에 위치하고 있던 백제를 침공하여 멸망시켰다는 주장은 역사개그일 뿐이고, 고려 때 거란이나 원나라가 고려를 침공했던 것도 바로 지금의 발해 북쪽 난하부근에 위치하고 있던 고려를 침공했던 것이지 한반도를 침공했던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