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백제와 북위는 지금의 어디에서 싸웠을까? - 최초주장
남제서 백제국전을 보면,
백제 동성왕이 남제에 사신을 보내 전쟁에서 공을 세운 신하들의 관작을 요청한 표문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백제가 488년에 일어난 북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490년에 남제에 보낸 표문에는,
면중왕 저근을 도장군 도한왕으로,
건위장군 팔중후 여고를 영삭장군 아착왕으로,
건위장군 여력을 용양장군 매로왕으로,
광무장군 여고를 건위장군 불사후로,
행건위장군 광양태수 겸장사 고달을 용양장군 대방태수로,
행건위장군 조선태수 겸사마 양무를 건위장군 광릉태수로,
행선위장군 겸참군 회매를 광무장군 청하태수로 임명해달라고 하자 그를 승인하고, 동성왕에게도 그 할아버지 모도왕이 받았던 작위와 같은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의 작위를 보내오게 되고,
☆ 자치통감 권136 제기2 세조무황제 상지하 영명6년(488) 12월조를 보면, “魏遣兵擊百濟 爲百濟所敗(위나라가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했는데 백제가 패하였다)”라고 백제가 488년에 북위에게 패전했다는 기록이 들어 있는데, 건강실록(建康實錄)이라는 기록에 의하면 백제가 북위에게 패전한 때는 484년이었다. 따라서 사서의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백제와 북위는 484년, 488년, 490년 세 번에 걸쳐 전쟁을 하여 484년에는 북위가 승전했으나 그 후 488년, 490년 두 번의 전쟁에서는 백제가 대승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위 자치통감의 기록은 영명2년(484)의 사실을 영명6년(488)으로 그 연대를 착각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 490년에 북위가 또다시 수십만 기병을 동원하여 백제를 침공해오자 동성왕이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를 보내 대승을 한 후 495년에 다시 남제에 사신을 보내,
사법명을 정로장군 매라왕으로,
찬수류를 안국장군 벽중왕으로,
해례곤을 무위장군 불중후로,
목간나를 행광무장군 면중후로,
행용양장군 낙랑태수 겸장사 모유와 행건무장군 성양태수 겸사마 왕무, 그리고 겸참군 행진무장군 조선태수 장색에게 관작을 내려줄 것을 요청하자 남제에서 그를 승인해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기록 속에는 광양, 대방, 조선, 광릉, 청하, 낙랑, 성양 등 많은 지명들이 언급되고 있다.
☆ 남제서는 서기 479-502까지 존속했던 남제의 역사서로서 양나라의 소자현이 6세기 중반에 완성한 사서이다. 그런데 소자현은 바로 남제 예장왕의 아들로서 남제가 멸망한 후 스스로 남제의 역사서를 썼으므로 기록은 아주 정확할 것이다.
그런데 동성왕의 표문에 나타나는 지명들의 위치가 한반도가 아니라 지금의 중국 북경, 하북성, 산동성 지역이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고, 남제서에 기록된 백제와 북위의 전쟁기록을 살펴보면 백제와 북위가 국경을 맞대고 있지 않았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며, 북위가 수십만 기병을 배에 싣고 서해바다를 건너와 한반도 남부에 위치한 백제를 침공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 남제서에는 490년의 백제와 북위의 전쟁에 대하여,
“이해(A.D.490)에 위나라 오랑캐가 또 다시 기병 수십만을 동원하여 백제를 침공하여 오니 모대가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를 보내 무리를 거느리고 북위의 오랑캐군을 기습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무찔렀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동성왕이 남제에 보낸 표문을 보면, “지난 경오년(A.D.490)에는 험윤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숙이 침입했으나 내가 사법명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역습하게 하여 한밤중의 번개처럼 기습 공격하니 흉리가 당황하여 마치 바닷물이 쓸려가듯 붕괴되었습니다. 그 기회를 타서 쫓아가 베니 시체가 들판을 붉게 물들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 예기가 꺾여 고래처럼 사납던 그 흉포함이 사라졌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백제가 대승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동성왕 때 백제와 북위는 분명 국경을 맞대고 있었을 것인데, 당시 북위의 도읍은 평성(현 대동), 낙양이었고, 백제의 도읍은 웅진 즉 지금의 북경 동쪽 난하 부근의 진황도 노룡이었다.
당시 백제와 북위의 국경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의 성도인 석가장 부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와 북위는 바로 그 부근에서 전쟁을 했을 것이고, 백제가 북위와의 전쟁에서 승전하고 땅을 넓힌 후 그 지역을 다스릴 광릉태수, 청하태수, 성양태수 등을 새로이 임명했을 것이다.
☆ 백제가 북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전쟁배상금을 받았는지, 혹은 배상금 대신 땅을 더 양도받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찌되었든 백제 동성왕이 광릉태수, 청하태수 등을 임명한다는 것은 그 땅이 백제 땅이었기 때문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왜냐하면 동성왕이 남제에 표문을 보내 임명을 승인해달라고 한 청하태수(淸河太守)는 지금의 산동성 제남시 서북쪽이며 황하 북쪽에 위치한 하북성 청하현 부근을 다스릴 관리를 말하는 것이라 생각되고,
광릉태수(廣陵太守)는 양자강의 바로 북쪽에 위치한 지금의 강소성 양주(揚州)부근을 다스릴 관리를 임명하는 것이라 말하기도 하는데, 청주(靑州)에 관한 독사방여기요의 기록을 보면, 남청주의 치소가 “광릉(廣陵)”이었다는 기록도 있어 필자는 동성왕이 말한 광릉태수는 남청주 즉 지금의 산동성 임기시 부근지역을 다스릴 관리를 임명하는 것이라 이해하고 있다.
☆ 광양태수는 지금의 북경과 천진의 중간지역인 하북성 낭방시 부근을 다스리던 관리를 말하고, 대방태수는 준화 부근, 낙랑태수는 하북성 보정부근, 성양태수는 산동성 창읍 부근지역을 다스리던 관리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의 난하부근 노룡에 도읍하고 있던 백제(대륙백제)는 동진 말기에 요서군과 진평군을 차지하고 그를 기반으로 동성왕이 서남쪽에 위치했던 북위와의 전쟁에서 거듭 승리함으로써 점점 강역을 넓혀 가 영정하(옛 요수)와 황하하류를 건너 산동성 부근까지 진출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위덕왕 18년(A.D.571) 조에, “북제의 후주가 또 왕을 임명하여 사지절 도독 동청주제군사 동청주자사를 삼았다”는 기록이 이를 확인시켜 준다.
동청주는 지금의 산동성 동쪽 끝 부분인 산동반도 부분을 말하는 것으로서 치소는 교주(膠州), 청도(靑島) 부근이었을 것인데, 동성왕(재위 : 479-501)보다 한참 후대인 위덕왕(재위 : 554-598)이 동청주제군사 동청주자사의 작위를 받았다는 것은 이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백제가 동청주 지역을 완전히 차지하고 통치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삼국사기 기록 속 백제는 한반도 남부에 위치하고 있던 나라가 아니라 요동(지금의 북경 부근) 동쪽 1천여리인 지금의 당산, 진황도 부근에 위치하고 있던 나라였고, 그곳에서 남쪽으로 강역을 넓혀 가 위덕왕 때 지금의 산동반도인 동청주까지 진출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백제는 그 땅을 언제쯤 잃었을까?
필자가 보기에는 수나라 초기에 그 땅을 잃었던 것아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북제가 위덕왕 18년(A.D.571)에 위덕왕에게 보내온 작위가 “사지절 도독 동청주제군사 동청주자사”였으나 그로부터 불과 10년 뒤인 위덕왕 28년(A.D.581)에 수나라에서 위덕왕에게 보내온 작위는 “상개부 의동삼사 대방군공”이기 때문이다.
즉 대방군은 지금의 북경 동쪽 준화 부근을 말하는 것이었고, 그곳은 백제 땅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은 지금의 요하 동쪽에서 수나라군과 무왕이 만났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