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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황룡사 장육존상이 조선 중기까지 존재하고 있었다고라?

윤여동 2012. 3. 18. 18:47

윤여동설 - 황룡사 장육존상이 조선 중기까지 존재하고 있었다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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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리산 법주사 금동미륵대불 : 소원을 빌면 반드시 들어준다고 하는 심우외여원인의 수인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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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 경주 (전) 황룡사지 목탑지 발굴 당시 현장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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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 경주 (전) 황룡사지장육삼존불 좌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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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유사 제3권 탑상 제4 황룡사(皇龍寺) 장육 편을 보면,

  "신라 24대 진흥왕 재위 14년 계유(A.D.553) 2월에 용궁 남쪽에 궁궐을 지으려 하였는데, 그곳에서 황룡(黃龍)이 나타나자 이를 고쳐서 절을 짓고 이름을 황룡사(黃龍寺)라 하고, 기축년(A.D.569)에 이르러 담장을 쌓아 드디어 17년 만에 완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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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룡사(皇龍寺)라고도 하고, 황룡사(黃龍寺)라고도 하였으니 어떤 것이 원래의 이름인지 헷갈린다. 혹시 처음에는 황룡이 나타났다하여 황룡사(黃龍寺)라 하였다가 후일 선덕여왕 때 9층목탑을 세운 후에 황룡사(皇龍寺)로 절 이름을 바꾸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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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 남쪽 바다에 배 한척이 나타나서 하곡현 사포에 닿았다. 살펴보니 편지가 있었는데 서축(서쪽에 있는 천축국 즉 인도) 아육왕(아쇼카왕)이 황철 5만7천근과 황금 3만푼을 모아 석가의 존상 셋을 만들려고 하다가 이루지 못해서 배에 띄워 보내면서 부디 인연 있는 곳으로 가서 장육존상이 이루어지기를 원한다고 했고, 하나의 부처상과 두 보살상의 모형이 함께 실려 있었다.

  현의 관리가 문서를 갖추어 보고하자 왕은 사자를 보내 그 고을의 성 동쪽의 높고 깨끗한 땅을 골라 동축사를 세우고 세 불상을 모시게 했다.

  그리고는 금과 쇠는 서울로 보내라 하여 태건 6년(A.D.574) 3월에 장육존상(丈六尊像)을 주조했는데 그 무게는 3만5천7근이었고 황금은 (1만이라는 글자가 탈락되었음)198푼이 들었고, 두 보살상은 쇠 1만2천근과 황금 1만136푼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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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35년(A.D.574) 조를 보면, “봄3월에 황룡사의 장육상 주조가 완성되었는데, 구리의 무게가 3만5천근이요, 도금한 금의 무게가 1만198푼이었다” 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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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장육존상을 황룡사(皇龍寺)에 모셨더니 그 다음해에 불상에서 눈물이 발꿈치까지 흘러내려 땅이 한자나 젖었으니 이것은 대왕이 승하할 조짐이었다. 혹 이 불상이 진평왕 때 이루어졌다고 하기도 하나 이는 잘못된 말이다..............(중략)................

뒤에 대덕 자장이 중국에 유학하여 오대산에 이르렀더니 문수보살이 현신하여 비결을 주면서 그에게 말하기를, ' 너희 나라 황룡사(皇龍寺)는 바로 석가와 가섭불이 강연하던 곳으로 연좌석이 아직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천축국의 무우왕이 황철 몇 근을 모아서 바다에 띄워 보냈던 것인데 1300여년이 지난 뒤에야 너희 나라에 이르러서 불상이 이루어지고 그 절에 모셨으니 이는 대개 위덕의 인연이 그렇게 만들어준 것이다' 하였다.

  불상이 이루어진 후에 동축사의 삼존불도 역시 황룡사로 옮겨 안치했다.

  사기(寺記)에는 '진평왕 5년 갑진년(A.D.584)에 이 절의 금당이 이루어졌고, 선덕여왕 때에 이 절의 첫 번째 주지는 진골 환희사였고, 두 번째 주지는 자장국통, 그 다음은 국통혜훈, 그 다음은 상률사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병화(1238년 고려 고종 때의 몽고병란)가 있은 후 대상(大像)과 두 보살상은 모두 녹아 없어졌고, 작은 석가상만 남아 있을 뿐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삼국유사 기록 속에서  병화로 녹아 없어졌다고 하는 대상(大像)과 두 보살상은 황룡사 장육존상과 함께 만든 두 보살상 즉 황룡사장육삼존불상을 말하는 것임이 확실한데,

  이상하게도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지리역사서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경주부 고적 조를 보면, “황룡사는 월성 동쪽에 있었다. 지금은 (절은) 없어지고 다만 장육존상만 있다(皇龍寺在月城東 今廢 只有丈六像)”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신라 진흥왕 때 완성되었다는 황룡사 장육존상이 삼국유사에는 몽고병란 때 녹아 없어졌다고 기록되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선 중기까지 건재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둘 중의 하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음에 틀림없을 것인데, 고려시대 국존의 반열에까지 올랐으며 몽고병화를 직접 겪었던 일연스님이 거짓말 했을 리는 없을 것이고, 조선시대 만들어진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잘못 기록했을 것이다.

  필자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보는 이유는 신라는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서 건국되고 멸망했기 때문이다.

  신라의 중심 강역이 원래는 지금의 중국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일원이었고, 백제가 멸망한 후 하북성 진황도와 당산시 일원을 차지했다.

  따라서 신라 진흥왕 때 세웠다는 황룡사도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 세워졌고, 장육존상이나 9층목탑도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 세워졌음이 확실하기 때문이고, 고려 역시도 대륙이 중심강역이었음이 확실하다.

  그랬다가 조선이 건국되면서 대륙의 개경에서 한반도의 서울로 도읍을 옮김으로써 우리 역사의 중심이 대륙에서 한반도로 이동되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은 그 이후인 조선 중기에 완성되었다.

  그런데 지금 학자들은 신라가 대륙에 있었을 리가 없다고 하면서 한반도 경주에서 황룡사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는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조선왕조실록 중종 7년(A.D.1512) 11월10일(경진) 조를 보면, 

  “듣건대, 경주(慶州)에 동상(銅像)이 있는데, 길 가운데 서 있다고 하니 부수어 군기(軍器)를 만듦이 가할 것이다”라고 말한 중종의 말을 인용하여 황룡사 장육존상이 이때 부숴졌을 것이라고 하기도 하며, 경주에 황룡사를 복원한다고 하기도 하니 무어라 할 말이 없다.

  조선 중기에 경주의 고총들을 아무런 근거도 없이 멋대로 신라왕릉이라 비정했듯이 당시 어느 촌로의 말을 듣고 경주에 좀 큰 불상이 서 있던 폐사지를 황룡사터라고 명명했고, 그 불상을 황룡사 장육존상이라고 했던 것은 아닐까?

  어쨌던 지금 신라 때 만들어진 황룡사 장육존상은 이 세상에 없고,

  그 모습이 어땠는지도 알 길이 없음을 안타까워 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