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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탈해왕과 김알지의 숨겨진 관계

윤여동 2012. 9. 15. 20:14

윤여동설 - 탈해왕과 김알지의 숨겨진 관계 

 

 

삼국사기 탈해왕 조를 보면,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에서 태어났는데, 그 나라는 왜국 동북쪽 1천여리에 있었다. 앞서 다파나국왕이 여국왕(여인국왕)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내를 삼았더니 임신한 지 7년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이 말하기를 ‘사람으로서 알을 낳았으니 상서롭지 못하다. 마땅히 버려야 한다’하였다.

그 어머니가 차마 버리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과 보물을 함께 싸서 궤 속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그랬더니 처음에는 금관국 해변에 닿았으나 금관국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주워들이지 않았고, 다시 진한(신라) 아진포구에 닿았다.........때마침 해변에 사는 늙은 노파가 있어 궤를 열어 보니 웬 어린아이 하나가 들어 있었다. 그 노파가 이를 데려다 길렀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신라 4대 탈해왕이 다파나국왕과 여국왕의 공주 사이에서 출생한 왕자이었음을 알 수 있고 다파나국이 왜국의 동북쪽 1천여리쯤에 위치한 나라였음을 알게 한다.

그렇게 탈해는 신라에 오게 되었고, 신라에서 살게 되었다.

그리고 삼국유사 제4대 탈해왕 조를 보면,

탈해가 토함산(필자주 : 낭산이나 양산의 오기일 것이다)에 올라가 성안에 살만한 곳을 살펴 보았더니 산봉우리 하나가 마치 초사흘달 모양으로 보이는 곳이 있어 오래 살만한 곳이라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그곳을 찾아가 보았더니 바로 호공(瓠公)의 집이었다.

탈해는 그곳에 몰래 숫돌과 숯을 묻어 놓고는 다음날 아침 그 집에 가서 “이 집은 우리 조상들이 살던 집이요” 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호공은 그렇지 않다고 하여 다투게 되어 관청으로 가서 시비를 가리게 되었는데, 관리가 묻기를 “이 집이 네 집이라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느냐?” 하자 탈해가 대답하기를 “우리 조상은 원래 대장장이였습니다. 잠시 이웃 마을에 간 동안에 다른 사람이 빼앗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집 땅을 파보면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그리하여 그 집 땅을 파 보았더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으므로 탈해가 그 집을 빼앗아 살게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마디로 탈해는 두뇌가 비상한 아니 약간은 사기성도 있어 보이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실이 신라 남해왕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때 호공이라는 사람은 신라의 고관이었는데, 그러한 사람이 나이어린 탈해에게 꼼짝 못하고 집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남해왕은 탈해가 지혜로운 사람이라 생각하고는 큰 딸을 주어 아내를 삼게 하였다.

이렇게 탈해는 신라 남해왕의 부마가 되었고, 후일 신라의 왕위에도 오르게 된다.

 

그런데 삼국사기 탈해왕 9년 조를 보면,

“봄3월에 왕이 밤에 금성 서쪽 시림의 숲속에서 닭우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새벽에 호공을 보내 살펴보았더니 나뭇가지에 자그마한 금궤가 걸려 있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그대로 보고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궤를 가져다 열어 보았더니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는데, 용모가 준수하고 위엄이 있었다.

왕이 기뻐하여 측근에게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는 거두어 길렀다. 그가 자라매 총명하고도 지략이 많았으므로 이에 알지라 이름 짓고 그가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씨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김알지가 탈해왕의 양자가 되었음을 알 수 있고,

삼국유사 김알지 탈해왕대를 보면,

“탈해왕은 길일을 가려 알지를 태자로 책봉했는데 뒤에 태자의 자리를 파사왕(박씨)에게 물려주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알지가 탈해왕의 태자로 봉해지기도 했었음을 알게 한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드는 것은 탈해왕에게는 알지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구추라는 아들이 있었다.

 

☆ 삼국사기 벌휴이사금 조를 보면, “벌휴이사금은 탈해이사금의 아들 구추 각간의 아들이다(필자주 : 실제는 5세손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탈해왕에게 구추라는 친아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구추는 탈해왕과 남해왕의 딸 아효부인 사이에서 출생했을 탈해왕의 장남으로서 벼슬이 각간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역사에서 구추 각간이라 하는 인물인데, 이상하게도 탈해왕은 자신의 친아들 구추를 태자로 봉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나, 누가 보아도 양아들로 볼 수 밖에 없는 알지를 태자로 봉했다는 기록은 존재한다.

 

탈해왕은 왜 자기의 친아들도 아닌 양아들 알지를 태자로 봉해야만 했던 것일까?

혹시 알지가 탈해왕의 실제적인 친아들로서 장자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혹시 탈해는 남해왕의 딸과 혼인하기 전에 궁중 밖에 사랑했던 여인이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데 남해왕이 딸을 주고 탈해를 부마로 삼게 되어 탈해는 사랑하던 여인 곁을 떠나 궁중에 들어가 살아야 했고, 그 첫사랑 여인은 궁 밖에서 탈해의 아들을 낳았던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소식을 전해들은 탈해는 그 아들을 아무 무리없이 궁중으로 데려올 방법을 궁리하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즉 탈해는 그 여인으로 하여금 한 밤중 아무도 모르게 왕궁에서 가까운 시림(계림) 숲속에 알지를 금궤에 넣어 걸어 놓게 하고는, 호공으로 하여금 아침 일찍 시림으로 가보게 하였고, 호공은 그곳에서 금궤를 발견하게 되며, 호공이 상황을 보고하자 탈해가 직접 그곳으로 가서 금궤를 열고 그 어린아이를 궁중으로 데리고 들어와 하늘이 주신 아들이라 하면서 양아들로 삼는다면 어느 누구도 그 행위에 대하여 의심을 할 수 없을 것이고, 반대할 수도 없을 것이다.

 

☆ 호공이라는 사람은 신라 혁거세거서간 38년 조에, “호공이란 사람은 그 족성이 미상한데 본래는 왜인으로서 처음에 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왔기 때문에 호공이라 불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도 밖에서 낳은 자식을 자기집 대문 앞에 놓고 가게하고는 하늘이 주신 자식이라 하면서 업동이로 들여 자신의 자식으로 삼는 경우가 가끔 있었는데, 이와 유사한 방법이라 하겠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일 경우 탈해가 알지를 얻었을 때 측근 사람들에게 왜 알지를 하늘이 주신 자식이라 말하면서 거두어 기르게 되었는지, 왜 그를 태자로 봉하게 되었는지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탈해는 알지에게 자신의 성씨인 석씨 성을 붙일 수는 없었다.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있었기 때문에 석씨와는 다른 "김(金)"씨 성을 붙여주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석구추와 김알지는 모두 탈해의 혈통을 이어받았으나 어머니만 달랐다고 할 수 있다.

즉 구추는 탈해와 남해왕의 딸 아효부인 사이에서 태어났고,

알지는 탈해와 어느 이름 모를 여인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이 이러할 경우 알지는 혈통을 알 수 없는 사람이 아니라 탈해의 친아들로서 원래 왕족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결국 신라 초기 박씨들이 왕위에 오른 시기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시기를 탈해왕의 혈손들이 신라를 지배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위 글은 역사적 인물인 석탈해왕과 김알지에 대하여 그 둘의 관계를 추정해 본 것일 뿐, 특정 성씨와는 관련이 없음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