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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임유관(臨渝關)의 원래위치 찾기 - 최초주장

윤여동 2014. 4. 6. 20:49

윤여동설 - 임유관(臨渝關)의 원래위치 찾기 - 최초주장

 

 

 

  수서 고구려전을 보면,

  원(고구려 26대 영양왕)이 말갈의 기병 1만여명을 거느리고 “요서(遼西)”를 침공하였으나 영주(營州)총관 위충이 격파하여 쫓아버렸다.

  수나라 고조가 이를 듣고 크게 노하여 한왕 량(諒)을 원수로 삼고 수군과 육군을 총동원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는 한편 조서를 내려 (고구려 영양왕)의 작위(상개부 의동 삼사 요동군공 고구려왕)를 삭탈하였다.

  이때 군량수송이 중단되어 6군의 식량이 떨어지고 또 군사들이 “임유관(臨渝關)”을 지났는데 전염병이 돌아 왕사의 군사가 기세를 떨치지 못하였다.

  요수에 도착하자 원(고구려 영양왕)도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고 표문을 올렸는데, “요동 분토의 신 원 운운” 하였다.

고조는 이에 군사를 거두어들이고 지난날과 같이 대우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 권제20 고구려본기 제8 영양왕 9년(A.D.598) 조를 보면, “왕이 말갈의 군사 1만여명을 거느리고 ”요서(遼西)”를 침공하였더니 영주총관 위충이 우리 군사를 공격하여 물리쳤다. 수 문제가 이 말을 듣고 크게 성을 내어 한왕 량과 왕세적 등을 모두 원수로 임명하여 수군과 육군 30만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여름6월 (수) 문제가 조서를 내려 왕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한왕 량의 군사가 “임유관(臨渝關)”까지 왔을 때 장마로 인하여 군량수송이 계속되지 못하므로 군사들의 먹을 것이 떨어지고 또한 전염병을 만났다. 그리고 주라후는 동래로부터 뱃길로 평양성으로 오다가 역시 풍파를 만나 선박들이 유실되거나 침몰되었다.

  가을 9월에 수나라 군사가 돌아갔는데, 죽은 자가 십중팔구였다” 라고 좀 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당시의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게 한다.

  같은 사건에 대하여 수나라의 기록과 고구려의 기록에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기록이 서로 수치스러운 부분은 생략하고 자랑스러운 부분은 부각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645년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하였을 때 안시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철군하였는데, 신당서 고구려전을 보면 이때의 상황을, “처음 전쟁을 시작하였을 때 병사가 10만명, 말이 1만필이었는데, 돌아올 때에는 사람은 1천여명 정도가 죽었으나 말은 열에 여덟은 죽었다. 수군 역시 7만명 중 수백명이 죽었다. 조서를 내려 전사한 시신을 모아 ”유성(柳城)”에 장사지냈는데, 제물을 푸짐하게 준비하여 제사를 지냈다.

  태종이 와서 곡을 하니 따르는 신하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태종이 말을 달려 “임유관(臨渝關)”으로 들어가자 황태자가 길 옆에서 맞이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유성(柳城)”과 “임유관”이 언급된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기록 속 “요서(遼西)”와 “임유관(臨渝關)” 그리고 “유성(柳城)”의 위치를 잃어버려 그 위치를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그 위치가 밝혀진 것이다.

 

☆ 유성(柳城)은 옛 고죽국(孤竹國)의 도읍이었고, 전연의 도읍 용성(龍城)이 되었던 곳인데, 지금의 북경 서남쪽 방산구 유리하진(琉璃河鎭) 부근으로서 가까이에 대석하(大石河)가 흐르고 있다. 그런데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하였다가 철군하면서 유성에 전사자를 모아 묻어주고 나서 바로 임유관을 통과하였다고 하였고, 임유관(臨渝關)은 유수(渝水)에 임하고 있는 관문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대석하가 원래는 유수였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유리하대석교인데 옛날에는 유수(渝水)를 건너다니던 다리였을 것이다. 옛날 당 태종도 고구려 침공에 실패하고 철군할 때 유성을 지나 이 다리를 건너 갔을 가능성이 많다. 물론 지금의 이 유리하대석교는 명나라 때 것이라고 하는데 옛날에 만들어졌던 석교를 명나라 때 다시 고쳐쌓았던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