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백제 동성왕의 탐라정벌로 - 최초주장
삼국사기 백제본기 문주왕 2년(A.D.476) 조를 보면,
“여름4월 탐라국(耽羅國)에서 토산물을 헌상하매 왕이 기뻐서 그 사자에게 은솔 벼슬을 주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동성왕 20년(A.D.498) 조를 보면,
“8월 왕이 탐라(耽羅)에서 공납과 조세를 바치지 않기 때문에 그를 치려고 무진주(武珍州)에 이르니 탐라에서 이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므로 중지하였다[탐라는 곧 탐모라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동성왕이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탐라를 정벌하기 위해 무진주까지 출전했었음을 알 수 있다.
동성왕은 반도백제 모도왕의 둘째 손자로서 반도백제가 대륙백제를 흡수통합한 후 그 할아버지 모도왕의 명을 받고 한반도에서 발해 북쪽 대륙으로 건너가 대륙백제의 왕위에 오른 첫 인물이었고,
북위와의 대규모 전쟁에서도 승리하여 백제의 강역을 많이 넓힌 왕인데,
이때 백제와 탐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어 탐라가 조공을 바치지 않았는지 확실하게는 알 수 없으나,
필자가 추정하기에는 북위와 백제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던 탐라는 이때 두 나라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이후 동성왕은 임류각을 짓고, 연못을 파고 진기한 새를 기르는 등 정치를 등한시 하게 되고, 결국은 위사좌평 백가를 가림성주로 좌천시킨 것이 화근이 되어 이에 앙심을 품은 백가에 의해 시해당하고 만다.
☆ 위사좌평은 왕과 왕궁을 호위하는 직책을 맡은 고위관리인데, 이를 가림성주로 임명했다는 것은 좌천시켰다는 말이다.
동성왕 당시 백제의 도읍은 웅진(熊津)이었는데, 역사학자라는 사람들은 지금의 한반도 충남 공주(公州)가 백제의 도읍 웅진, 제주도가 탐라, 광주가 무진주였다고 인식함으로써 동성왕이 탐라를 정벌하기 위해 충남 공주에서 출발하여 광주(光州)까지 갔었다고 역사를 해석한다.
그러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한반도에 관한 기록이 아니라 대륙삼국에 관한 기록으로서 당시 백제의 도읍 웅진은 한반도의 충남 공주가 아니라 발해 북쪽 청룡하 하류에 위치한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盧龍)이었다.
따라서 백제 동성왕은 당시의 도읍이었던 진황도 노룡을 출발하여 무진주(광주)까지 갔던 것이다.
그러자 지금의 산동성에 위치했던 탐라(탐모라)에서 놀라 사신을 보내 사죄하자 동성왕이 군사를 돌려 돌아왔던 것이다.
역사적 사실은 이랬다.
그러나 역사학자라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는(어렴풋이 알고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속의 기록들이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이었다고 잘못 인식하고는 그 기록 속 사건의 현장들을 한반도에서 찾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고대 역사의 현장을 확실하게 찾을 수 없어 사람에 따라 이곳이다 저곳이다 하면서 주장들만 난무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 우리 삼국 역사의 현장은 지금 대륙의 북경, 하북성 북부 부근인데, 그 기록을 한반도로 가져와 한반도에서 그 역사의 현장을 찾는다고?
실소를 머금을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