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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신라의 태백산(太白山)은 어디에 있었을까? - 최초공개

윤여동 2014. 11. 29. 08:15

윤여동설 - 신라의 태백산(太白山)은 어디에 있었을까? - 최초공개 

 

 

 

 

 

삼국사기 신라본기 일성이사금 5년(A.D.138)조를 보면,

  "겨울10월 왕이 북방으로 순행을 하여 태백산에 친히 제사를 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기림이사금 3년(A.D.300) 조를 보면,

  “3월 왕이 우두주(牛頭州)에 이르러 태백산(太白山)에 제사를 지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우두주에 신라의 태백산이 위치한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리고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백제본기에는 우두주에 관한 기록이 여러 번 등장하고, 특히 신라와 백제가 그 우두주를 놓고 뺏고 빼앗기는 쟁탈전을 벌인 것으로 나타난다.

  기록을 보면,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18년(B.C.1) 조를 보면, “11월 왕이 낙랑의 우두산성을 습격하려고 구곡까지 갔다가 큰 눈을 만나 돌아오고 말았다”라고 하면서 우두(牛頭)라는 지명이 최초로 언급되고 있고,[필자주 : 이때는 우두산성이 낙랑동부도위에 속해 있었을 것이다]

  신라본기 나해이사금 27년(A.D.222) 조를 보면, “10월 백제 군사가 우두주(牛頭州)를 침공해 오니 이벌찬 충훤이 군사를 거느리고 막다가 웅곡에서 패하여 단신으로 돌아오니 그를 진주로 강등시키고 연진을 이벌찬으로 삼아 군사사무를 겸하여 보게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백제본기 구수왕 9년(A.D.222)조에도, “겨울10월 신라의 우두진으로 군사를 보내 민가를 약탈하였더니 신라 장수 충훤이 군사 5천을 거느리고 웅곡에서 우리 군사를 맞아 싸우다가 크게 패하여 단신으로 도망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동일한 사건에 대한 기록이고,

  신라본기 기림이사금 3년(A.D.300) 조에는, “3월 왕이 우두주에 이르러 태백산(太白山)에 제사를 지냈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백제본기 동성왕 8년(A.D.486) 조를 보면, “가을7월 우두성을 쌓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라본기 진덕여왕 원년 조를 보면, “2월 이찬 알천을 임명하여 상대등을 삼고, 대아찬 수승을 우두주군주로 삼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태종무열왕 2년(A.D.655) 조에는, “겨울10월 우수주(우두주)에서 백록을 바쳤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효소왕 7년(A.D.698) 조에는, “봄정월 이찬 체원으로 우두주총관을 삼았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성덕왕 35년(A.D.736) 조에는, “이찬 윤충, 사인 영술을 보내 평양주와 우두주 두 주의 지세를 살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애장왕 2년(A.D.801)조에는, “가을9월 우두주에서 흰꿩을 바쳤다”

  애장왕 5년(A.D.804) 조에는, “우두주 난산현에서 누워있던 돌이 일어섰다”라고 우두주(우수주)에 관하여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두주(우수주)는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원도 춘천도호부 건치연혁을 보면,

  “본래 맥국인데 신라의 선덕여왕 6년에 우수주(牛首州: 首는 頭로도 쓴다)로 만들고 군주를 두었다. 문무왕 13년에는 수약주(水若州 : 오근내라고도 하고 수차약이라고도 한다)라고 불렀고, 경덕왕이 삭주(朔州)로 고쳤다가 뒤에 광해주(光海州)로 고쳤다. 고려 태조 23년에 춘주(春州)로 만들었고.............

  조선 태종 13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군(춘천군)으로 만들었다가 15년에 준례에 따라 도호부(춘천도호부)로 승격시켰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산천 조를 보면, “우두산(牛頭山) : 부의 북쪽 13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강원도 춘천의 옛 이름이 우두주(우수주), 수약주, 삭주였고, 춘천의 북쪽 13리쯤에 우두산이라는 산도 있었음을 알게 한다.

 

  그런데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환웅설화를 보면, “환웅이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太白山) 꼭대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는데, 이곳을 신시(神市)라 하고 이분을 환웅천왕이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규원사화 단군기를 보면, “태백산 서남쪽 우수하 벌판(牛首河之原)에 도읍을 세우고 왕검성(필자 주 : 태백산 동남쪽 우수하지원 아사달의 오기가 아닐까?)이라고 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환웅의 신시와 고조선의 초기 도읍 아사달이 바로 이 태백산 부근에 위치했음을 알게 하므로 우리 민족에게 있어 태백산은 아주 성스러운 산이라 할 수 있고, 우리 역사의 중심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수서 말갈전을 보면,

  “도태산이 있는데, 풍속에 매우 숭상하고 경외시한다. 산속에는 곰, 큰곰, 표범, 이리 등이 있으나 모두 사람을 해치지 않고, 사람도 이들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북사 물길전을 보면,

  “그 나라 남쪽에 종태산(從太山 : 徒太山의 오기가 아닐지...)이 있는데, 중국 말로 태황이라는 뜻이다. 그 산을 지나가는 사람은 오물을 담아가지고 간다. 산속에는 곰, 큰곰, 표범, 이리가 있으나 모두 사람을 해치지 않고 사람들 역시 그들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당서 흑수말갈전을 보면,

  “흑수말갈은 숙신 땅에 사는데, 또한 읍루라고도 한다. 원위 때에는 물길 이라고도 했다. 직선으로 경사에서 동북쪽으로 6천리에 있는데, 동쪽은 바다에 접하고, 서쪽은 돌궐에 닿으며, 남쪽은 고구려, 북쪽은 실위와 접했다. 수십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추장들이 각각 자치적으로 다스린다. 잘 알려진 것이 속말부로서 가장 남쪽에 위치하고 태백산(太白山)에 이른다. (그 산을) 도태산(徒太山)이라고도 하는데, 고구려에 접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당서 북적 발해전을 보면,

  “만세 통천 중에 거란의 이진충이 영주도독 조홰(조문홰)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사리 걸걸중상이라는 자가 말갈추장 걸사비우 및 고구려의 남은 무리와 함께 동쪽으로 달아나 요수를 건너 태백산(太白山) 동북쪽을 거점으로 하여 오루하와의 사이에 성벽을 쌓아 수비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태백산이 말갈 중에서도 가장 남쪽에 위치했던 속말말갈의 남쪽경계였음도 알수 있고, 말갈족들도 그 산을 매우 신성시 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신라의 왕도 그 태백산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으니 신라 역시 그 산을 신성하게 여겼다는 말이 된다. 신라나 말갈이 모두 옛 환인, 환웅, 단군의 후예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사실 고대의 태백산(太白山)은 지금의 백두산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중국 하북성과 내몽골의 경계에 위치한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 2,067m)을 말하는 것이고, 우수주는 멀리 떨어진 지금의 능원(凌源)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대광정자산과 능원은 직선 거리로 따져도  약 220km에 달하는 거리만큼 떨어져 있는 곳인데, 신라의 왕들은 왜 우수주에 와서 태백산에 제사를 지낸 것일까?

   멀리 떨어져 보이지도 않았을 태백산(太白山)을 향하여 망제(望祭)를 지낸 것일까?

   아니면 태백산으로부터 뻗어 내려온 산맥(지금의 칠로도산산맥)을 태백산이라 여기고, 그 산맥에서 제사를 지낸 것일까?

  아니면 우수주에 또 다른 태백산(太白山)이 있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