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거란 야율아보기의 발해상경 침공로를 밝힌다 - 최초공개
발해의 민심이 흉흉해지자 거란의 야율아보기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925년 윤12월 발해 상경을 향하여 진격한다.
가까운 길목에 부여성이 있었으나 926년 1월 3일 경신일에 함락되었는데, 부여성은 거란군이 성을 포위하자 단3일 만에 성문을 열고 항복해 버렸다.
그렇게 부여성이 무력하게 함락되자 발해에서는 급히 상경으로 오는 길목에 3만의 방어군을 배치했으나 이 군사들 역시 거란군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항복해 버리자 거란군은 홀한하를 건너 신속하게 발해 상경인 홀한성(忽汗城 : 상경용천부 )을 포위하게 된다.
이때 발해의 마지막 왕 대인선은 병에 걸려 요양 중에 있었다고 하고, 사기가 꺾인 장수들도 더 이상 거란군에 맞서 싸우려는 사람이 없었다.
또한 동경용원부, 중경현덕부, 남경남해부, 서경압록부에서도 상경용천부(홀한성)에 구원군을 보내지 않는다.
그리하여 홀한성이 포위된 지 단 3일 만인 1월 12일 기사일에 이르러 발해왕 대인선이 흰옷을 입고 양을 끌고 신하 300여명과 함께 나와 야율아보기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하고, 옥새를 들어 받침으로써 멸망하고 말았다.
[일설에는 1월 12일에 발해왕 대인선이 항복을 하자 무장해제를 시키려고 홀한성으로 들어간 거란군을 항복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죽이는 사고가 발생하여 1월 14일 신미일에 이르러서야 항복절차가 완전하게 마무리 되었다고도 한다]
해동성국 발해가 왜 이렇듯 보름도 안 되는 기간 안에 허무하게 멸망하고 말았는지 동경, 중경, 남경, 서경에서도 왜 상경으로 구원군을 보내지 않았는지 정말로 의아하다.
왕이 사치와 향락에 빠져 정사를 등한시 했다는 기록도 없고, 나라에 갑자기 재난이나 변고가 발생했다는 기록도 찾아볼 수 없는데, 이때 왜 발해의 민심이 이반되어 있었는지, 왜 군사들이 목숨걸고 악착같이 나라를 지키려고 하지 않았는지 의문스러운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어쨌든 그렇게 해동성국 발해는 멸망하고 말았고, 거란(요)이 흥기하게 되는데, 야율아보기는 항복한 발해 땅(일설에는 부여성을 동단국으로 고쳤다고 하는데, 혹시 옛 부여성이 거란지리지도에 나타나는 신상경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을 동단국(東丹國) 즉 동거란국이라 명명하고 태자 도욕을 동단국왕으로 임명했다가 2년 뒤인 928년에 동단국 백성들을 요동으로 옮기고 남경[필자주 : 이 남경은 후일 938년에 거란의 동경요양부로 바뀌게 된다]이라 명명한다.
아마 이때쯤 발해에서 부흥운동이 불처럼 일어나자 더 이상 동단국(동거란국)을 유지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옛 발해 땅을 포기하면서 그 백성들은 요동으로 강제이주 시켰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 강제로 이주시킨 발해 백성들은 두고 두고 요나라의 골칫거리가 된다.
왜냐하면 후일 정안국, 흥요국, 대발해국 등이 바로 요동(필자주 : 요 동경요양부로서 지금의 북경 부근)부근을 중심으로 발해부흥운동을 전개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