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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부여씨와 해씨, 고씨의 패권경쟁이 곧 백제와 고구려의 역사 - 최초주장

윤여동 2015. 12. 4. 07:20

윤여동설 - 부여씨와 해씨, 고씨의 패권경쟁이 곧 백제와 고구려의 역사 - 최초주장 

 

 

 

  부여는 원래 단군왕검의 넷째아들 부여에게 주어진 영지로부터 유래했으므로 국호를 부여라 했고, 고조선의 서쪽지역에 위치했다.

  원래 부여왕실의 성씨는 부여씨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세월이 흐르자 부여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게 된다.

  그리하여 해씨인 해모수가 부여의 왕위를 찬탈하게 되자 그에 반발한 부여씨 동명왕이 다시 왕위를 제자리로 돌려놓게 되고, 패한 해씨들은 북쪽으로 도망쳐 예를 밀어내고 다시 나라를 세우게 되는데, 역사에서는 이를  동부여라 한다.

 

☆ 동부여에게 그 땅을 빼앗긴 예는 동쪽으로 이동하여 임둔을 밀어내고 다시 그 땅에 예(동예)를 건설하는데, 이때 밀려난 임둔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 혹시 이들이 베링해를 건너 아메리카로 가서 인디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 두막루(북부여 땅을 동명왕에게 빼앗기고

                                                  그 일파가 멀리 밀려나 세운 나라로써 해씨로 추정)

 

                                     - 동부여(해씨)(북부여의 일파)

 

부여(부여씨) - 북부여(해씨) - 졸본부여(부여씨) ..................... 고구려(해씨고씨)

                                                   ↓

                                                    ------------ 백제(부여씨)

 

두막루국에 대하여 위서 권100 열전 제88 두막루 조를 보면, “두막루국은 물길국 북쪽 천리에 있는데 낙양에서 6천리 떨어져 있다. 옛 북부여이다. .................혹은 말하기를 본래 예, 맥의 땅이었다고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마 해모수가 부여의 왕위에 올라 국호를 북부여라 하였다가 그 후 졸본부여 동명왕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북쪽으로 도망쳐 해부루 일파는 동부여를 세웠고, 더 북쪽으로 도망친 일부가 그곳에 두막루국을 건설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졸본부여의 2대왕 부여무서왕에게는 아들이 없이 딸만 셋이 있었는데, 동부여에서 도망쳐 온 해모수의 후손인 주몽(추모)의 신분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둘째 공주의 부마로 맞아들이고 왕위를 물려주게 되어 졸본부여는 은연중에 해씨의 나라가 되고 말았다.

  앞서 부여무서왕에게는 부여우태라는 조카가 있었고 우태는 연타발의 딸 소서노라는 여인과 혼인하여 두 아들 비류와 온조를 낳았으나 불행하게도 일찍 죽고 말았다.

  그리하여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소서노는 두 아들을 데리고 추모왕(주몽왕)과 재혼을 하게 되는데, 이때 소서노는 동명왕의 혈손인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봉했다가 추모왕의 뒤를 이어 다음 왕위를 잇게 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추모왕에게는 동부여에서 도망칠 때 태중에 있던 남겨 놓고 온 아들 유리가 있었기 때문에 언젠가 유리가 동부여에서 탈출하여 자신을 찾아오게 되면 태자로 봉하여 왕위를 물려주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를 확인한 소서노는 졸본에서는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릴 수 없다고 판단하고 어린 두 아들 비류와 온조의 손을 잡고 압록강을 타고 내려와 대수와 패수를 건너 마한의 동북쪽 한산 부근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땅을 개척한 후 졸본부여의 맥을 잇는 백제를 건국하게 되고,

  졸본에서는 동부여에 있던 아들 유리가 도망쳐 찾아오자 추모왕이 그를 태자로 봉한 후 죽어 유리가 그 왕위를 잇게 되는 것이다.

  중국 사서들에 백제와 고구려가 함께 부여에서 나왔다는 말은 바로 이러한 상황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엄격히 따져보면, 원래의 부여왕실 정통후손은 백제인 것이고, 해씨는 부여씨로부터 왕위를 빼앗아간 원수지간으로서 고구려와 백제는 태생부터가 감정으로 얽힌 이상한 관계였던 것이다.

 

백제는 내내 부여씨 단일 성씨로 왕위가 이어졌으나 고구려 왕위계승을 보면, 추모왕(주몽왕)으로부터 5대 모본왕까지만 해씨였고, 6대 국조왕(태조왕)부터는 고구려왕실의 성씨가 고씨로 바뀌었다. 그렇지만 고씨들도 추모왕(주몽왕)을 건국시조로 받들었는데, 이는 유리왕이 국조왕(태조왕)의 아버지인 재사를 양자로 받아들였기 때문이고, 또 재사는 추모왕(주몽왕)의 딸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추모왕의 외손이었다. 즉 고구려는 해씨인 친손들과 고씨인 외손들로 왕위가 이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고구려 15대 미천왕이 낙랑군을 313년에, 314년에 대방군을 축출하고 그 땅을 차지하게 되자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는 드디어 국경을 맞대게 되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패권경쟁이 벌어지게 되는데, 결국 두 나라는 비슷한 시기에 함께 멸망하고 말았다.

 

[참고]

위서 권100 열전 제88을 보면,

물길국(勿吉國)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는데, 옛 숙신국이다............낙양에서 5천리 떨어져 있다

실위국(失韋國)은 물길의 북쪽 1천리에 있는데, 낙양에서 6천리 떨어져 있다

두막루국(豆莫婁國)은 물길 북쪽 1천리에 있는데, 낙양에서 6천리 떨어져 있다. 옛 북부여이다. 실위의 동쪽에 있고, 동쪽으로는 바다에 닿았다. 강역이 사방2천리이다. 그 사람들은 흙으로 집을 짓고, 궁실과 창고가 있다. 산릉과 넓은 못이 많다. 동이지역 중에서 가장 평탄하다. 땅은 오곡이 잘 자라지만 오과는 생산되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키가 크고 성질이 강직하며 용맹하고 근후하다..........혹은 말하기를 본래 예맥의 땅이었다고도 한다

지두우국(地豆于國)은 실위의 서쪽 1천여리에 있다. 소와 양이 많고, 명마가 산출된다.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는다. 오곡은 없어 고기를 먹고 락()을 먹는다

오락후국(烏洛侯國)은 지두우의 북쪽에 있다. ()의 도읍에서 4500리 떨어져 있다. 그 땅은 습하고 안개가 많고 기후가 춥다.............그 나라의 서북쪽에 완수가 있는데, 동북쪽으로 흘러 난수에 합류된다. 그 땅의 모든 작은 냇물은 모두 난수로 들어가는데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또 서북쪽으로 20일을 가면 우사니대수(于巳尼大水)가 있는데, 소위 말하는 북해(北海)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