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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성정왕후(成貞王后)”는 신라 33대 성덕왕의 첫 왕비가 아니라 32대 효소왕비이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16. 9. 10. 08:53

윤여동설 - “성정왕후(成貞王后)는 신라 33대 성덕왕의 첫 왕비가 아니라 32대 효소왕비이다 - 최초주장 

 

 

                  31대 신문왕 = 신목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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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자                                     차자

  32대 효소왕 = 성정왕후          33대 성덕왕 = 엄정왕후 = 소덕왕후

     (687-702)                           (691-737)                          

                                                                        |.................................

          ↓유복자                                           장자                차자                 3

            김수충                                      김중경      34대효성왕       35대 경덕왕

        (702년생)                          (705년생)    (721년생)          (722년생)

                                                 (요절)                                   

                                                                                   36대 혜공왕

                                                                                     (758년생)

 

  필자는 지금까지 성정왕후의 신분에 대하여, 성정왕후는 신라 33대 성덕왕의 첫 왕비가 아니라 32대 효소왕의 왕비였다고 여러 번에 걸쳐 주장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 재위 15년 조에 나타나는 성정왕후(成貞王后)”에 대하여, 백과사전 등에도 여전히 그녀가 성덕왕의 첫 왕비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를 바로잡기 위하여 다시 한번 강조하여 주장한다.

  성정왕후는 효소왕의 왕비라고..................

 

  신라 32대 효소왕은 서기 687년 봄2월에 31대 신문왕의 장자로 태어나 6913월에 태자로 봉해졌고, 6927월에 왕위를 이어받아 재위 11년인 7027월에 죽었다. 6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를 이어받아 16세에 죽은 것이다.

  33대 성덕왕은 32대 효소왕의 동복동생으로서 효소왕보다 네 살 아래였는데, 효소왕이 죽고 아들이 없었으므로(필자주 : 이때 효소왕의 아들은 복중에 있었고 아직 태어나지 않았었는데, 이가 곧 효소왕의 왕자 김수충이다) 효소왕의 동복동생인 성덕왕이 왕위에 올랐고 이때 성덕왕의 나이는 10여세에 불과하였다.

   그리하여 성덕왕은 아직 혼인을 하지 않은 상태로 왕위에 올라 재위 3(704) 5월에 이르러서야 승부령 소판 김원태의 딸과 첫 혼인을 하였는데, 이 여인이 바로 성덕왕의 첫 왕비 엄정왕후였고, 성덕왕의 장자 김중경을 낳았다.

 

  그런데 삼국사기 성덕왕 13(A.D.714) 조를 보면, 느닷없이 왕자 김수충을 당나라에 보내 숙위를 들게 하니 당 현종이 집과 비단을 주고 그를 총애하여 조회청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라는 기록이 나타나고,

  14(A.D.715) 조에는, “왕자 중경을 봉하여 태자로 삼았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15(A.D.716) 조에는, "성정왕후를 궁에서 내 보내는데, 비단 500, 200, 1만석, 저택 한 구역을 주었는데, 집은 강신공의 옛 집을 사서 주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성정왕후가 성덕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혼인했던 첫 부인이었고 그 아들이 김수충이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무언가 잘못을 저질러 폐출되어 궁에서 쫓겨났고, 그리하여 그 아들인 김수충도 성덕왕의 실질적인 장자였으나 그 어머니의 잘못과 연관되어 왕자로서의 자격을 잃게 되었을 것이라고 헷갈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국 어느 학자도 등신불 김교각 스님이 곧 김수충일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그가 왕자로서의 자격을 잃게 되자 자포자기 하는 심정으로 구화산으로 들어가 불교에 귀의하고 스님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등신불 김교각 스님은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보라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김문주 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성정왕후가 정말로 잘못을 저지르고 폐비가 되어 궁에서 쫓겨나야 했다면, 성덕왕은 왜 그 많은 재물을 주어 내 보내야만 했던 것일까?

  가까운 조선시대에도 죄를 짓고 폐비가 되어 궁에서 내 쫓긴 왕비에게 많은 재물을 주어 내보낸 경우는 없었다.

  신라 때나 조선시대 때나 죄를 짓고 폐비가 되어 궁에서 내쫓길 정도였다면 목숨 부지하고 살아나가는 것만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인데, 성덕왕은 이상하게도 많은 재물을 주어 성정왕후를 궁에서 내보내고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 왕력 신라 33대 성덕왕 조를 보면, “이름은 흥광이요, 본래 이름은 융기이고 효소왕의 아우이다. 처음 비는 배소왕후로 시호는 엄정(嚴貞)으로서 원대아간의 딸이고, 다음 비는 점물왕후로 시호는 소덕(炤德)으로서 순원아간의 딸이다. 임인년에 즉위하였고 치세는 35년간이다. 능은 동촌 남쪽에 있는데 양장곡이라고도 한다라고 성덕왕에게 엄정왕후와 소덕왕후 두 왕비가 있었고, 첫 왕비가 성정왕후가 아니라 엄정왕후라고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는데도 역사학자라는 사람들조차 성정왕후가 성덕왕의 첫 왕비라고 헷갈리고 있으니 참........ㅉㅉ

 

 

  이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첫째, 성정왕후는 성덕왕의 첫 부인이 아니라 그 형인 효소왕의 왕비였다.

즉 성덕왕의 형수인 것이다.

  둘째, 김수충은 효소왕의 유복자였다. 그리하여 효소왕이 죽었을 때에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었기 때문에 죽은 효소왕의 동생인 성덕왕이 왕위를 이을 수밖에 없었다.

  성덕왕은 왕위에 오를 때 죽은 형 효소왕의 아들이 태어나면 다음 왕위를 전해 주겠다고 약속했을 것이고, 그리하여 성정왕후는 왕궁에서 왕태후의 자격으로 왕자 김수충을 낳아 키우며 계속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셋째, 성덕왕은 왕위에 오른 후 첫 혼인을 하여 엄정왕후와의 사이에서 장자인 김중경을 낳았다. 그런데 성덕왕은 자신의 장자가 10세쯤 되자 욕심이 생기게 된다. 즉 자신의 장자를 태자로 봉하여 다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졌을 것이다.

  넷째, 그리하여 성덕왕은 걸림돌이 되는 효소왕(성덕왕의 형)의 왕자이며 자신의 장조카인 김수충을 당나라로 보내버린 후 자기의 친아들인 김중경을 태자로 봉했다.

  그러자 성정왕후는 약속을 지키라며 크게 반발하였을 것이고, 성덕왕은 형수인 성정왕후에게 많은 재물을 주어 궁에서 내 보내게 되는 것인데, 바로 이 내용이 성덕왕 15(A.D.716) 조의 성정왕후에 관한 기사이다.

 

 

  그런데 성덕왕의 입장에서 볼 때 뜻대로 잘 되어가던 일이 재위 16(A.D.717)에 이르러 일이 꼬이게 된다. 즉 태자로 책봉했던 중경이 책봉 1년 반 만에 갑자기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때 무슨 이유로 태자 중경이 죽게 되었는지 구체적인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때 성덕왕의 첫 왕비인 엄정왕후도 태자 중경과 함께 죽었거나 혹은 아들이 죽은 충격으로 얼마 후 죽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태자 중경이 죽자 효소왕비 성정왕후는 당시 당나라에 가 있던 자신의 아들 수충에게 빨리 돌아오도록 연락을 취하게 된다.

  이때 성정왕후는 태자로 봉해졌던 중경이 죽고, 성덕왕에게 다른 아들도 없었으므로 효소왕의 왕자인 자신의 아들 수충을 태자로 봉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당나라에 가 있던 김수충은 9월에 이르러 공자와 1072제자의 초상을 가지고 귀국하게 되지만, 성덕왕은 끝까지 장조카인 김수충을 태자로 봉하지 않고, 재위 19(A.D.720)에 새로이 이찬 김순원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게 된다. 이 여인이 바로 성덕왕의 두 번째 왕비 소덕왕후였고, 성덕왕은 이 소덕왕후 소생인 김승경을 재위 23(A.D.724)에 이르러 다시 태자로 봉했는데, 이가 곧 후일의 34대 효성왕이었다.

 

  이후 효소왕비 성정왕후와 효소왕의 왕자 김수충이 어떠한 삶을 살다 죽었는지 역사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데, 따라서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정이 가능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