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마고할미 전설의 발상지를 찾았다 - 최초공개
[노파의 얼굴 형상을 하고 있는 난하 대흑정수고 동쪽의 지세]
규원사화 단군기를 보면,
“단군이 이미 제후를 봉한 후 천하가 밝아지고 고요하더니 10년 만에 남이의 환란이 일어났다. 갑비고차(甲比古次)는 이미 남이(南夷)인의 땅이었다.
그리하여 부여(夫餘)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평정하게 하였다. 후에 부소(夫蘇)와 부우(夫虞)를 더 보내 갑비고차에 성을 쌓게 하고 남쪽으로 내려와서 지키게 하였다. 이곳이 지금 강화도의 삼랑성(三郞城)이다.
마리산(摩利山)에는 참성단(塹城壇)이 있으니 이것이 곧 단군이 단을 만들고 하늘에 제사지내던 두악(頭嶽)이다.......
단군이 하늘에 제사지내는 곳은 북쪽으로 사냥가면 태백산(太白山)이었고, 남쪽으로 가면 두악이었다.
갑비고차는 바닷가에 있어 배를 타고 가기가 쉬워서 남쪽으로 행차할 때는 반드시 단소에서 제사지냈다.
더욱이 그곳은 육지와 떨어져 있어 조용하고 산악이 정결하며 밝은 하늘과 바다가 보인다. 고요하고 깊고 밝고 깨끗한 기운은 사람들에게 신의 오르내림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단군 이전 천지창조 전설이라고 할 수 있는 “마고할미전설”이 한반도 전체에 걸쳐 여러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 중 북한 평양시 강동군 남쪽 구빈마을에 전승되고 있다는 전설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전해온다고 한다.
그 내용에 있어 위 규원사화 단군기의 내용과 상통하기 때문에 여기에 인용한다.
“옛날 단군이 거느리는 박달족이 마고가 족장으로 있는 인근 마고성의 마고족을 공격했는데, 싸움에서 패한 마고는 도망친 후 박달족과 단군의 동태를 살폈다. 그런데 단군이 자신의 부족에게 너무도 잘해 주는 것을 보게 되어 마고는 단군에게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항복하게 되었다.
단군은 투항한 마고와 그 아래 아홉 장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극진히 대접했는데, 아홉 손님을 맞아 대접한 곳이 구빈(九賓)마을이고, 마고가 항복하기 위해 마고성으로 돌아오면서 넘은 고개를 왕림(枉臨)고개라고 한다”라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필자가 주목하는 것 중의 하나는 단군이 세 아들을 보내 남이를 정복하고 쌓았다는 삼랑성 전설과 단군이 하늘에 제사지냈다는 두악 참성단 전설의 실제장소가 어디일까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왜 하필이면 노파와 관련된 마고전설로 전해졌을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삼랑성이나 두악을 한반도 강화도와 관련지어 생각하지만, 사실 한반도는 우리 상고사나 고대사의 현장이 아니다.
한반도의 강화도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명명된 섬 이름일 뿐이므로 그곳에 단군과 관련된 전설이 있을 수 없고, 그곳의 삼랑성이나 참성단이라고 하는 것은 누가, 언제, 무슨 목적으로 만든 것인지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유적인 것이다.
실제 고조선의 왕검성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고, 그곳에서 난하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면 하북성 당산시 천서의 청산관장성에 도달할 수 있는데, 그 부근 대흑정수고 동편의 지형이 마치 노파의 얼굴모습을 닮았다.
필자가 연구해 본 결과 지금의 청산관장성은 옛날 단군의 세 아들이 남이를 정복하고 갑비고차에 쌓았다는 삼랑성으로 비정되는 곳으로서, 마고할미전설과 연관시켜 보면, 고조선이 건국된 지 얼마 안 되어 남이(마고족)가 반란을 일으키자 단군 왕검이 아들을 보내 반란을 진압하고 성(삼랑성)을 쌓았다고 생각되고, 그곳이 원래 산수가 수려하고 역사가 깊으며,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기 때문에 단군도 그곳 두악에 새로이 단(참성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지냈다고 생각된다.
지금도 청산관장성 부근은 산수가 수려하기로 유명한 관광지로서 그곳이 바로 마고할미전설의 발상지로 보이는 곳이고, 고조선 때의 갑비고차였고, 고구려의 혈구였으며, 백제의 관미성이었고, 고려 때 대몽항쟁을 위해 고려의 왕들이 피난했던 강화였던 곳이다.
고려 때 판각한 팔만대장경의 흔적을 찾으려면 한반도의 강화도가 아닌 그곳으로 가야하고, 삼별초의 흔적 역시 그곳에서 찾아야 한다.
인식을 바꾸면 우리 고대 역사의 흔적들을 그곳에서 찾을 수 있으련만....................
그를 인식하는 사람이 많지 않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