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백제의 초기도읍 위례성(慰禮城)과 남한성(南漢城) 그리고 한산 부아악(負兒嶽) 찾기 - 최초주장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업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이므로 부아악(負兒嶽)이라 부르게 되었을 것이다]
삼국유사 왕력 백제시조 온조왕 조를 보면,
“계묘년에 즉위 재위 45년간 위례성(慰禮城)에 도읍 혹은 사천(蛇川)이라고도 함 지금의 직산(稷山) 병진년에 한산(漢山)으로 도읍을 옮김 지금의 광주(廣州)”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 권제37 잡지 제6 지리를 보면,
삼국시대의 지명만 전하고, 그 위치가 분명치 않다고 기록되어 있는 356곳 중에 “위례성(慰禮城)”이 들어 있다.
이를 보면 김부식이 1145년에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에도 이미 백제의 초기도읍 위례성의 정확한 위치는 잃어버렸던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고, 일연이 삼국유사를 지은 때에도 역시 위례성의 정확한 위치는 알지 못했던 듯하다.
그런데 그로부터 800-900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 그 잃어버린 위례성의 위치를 찾으려 한다는 것 자체가 무모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그 위례성의 흔적이라도 찾아 우리 백제 역사의 진실을 밝혀야 할 의무가 있다.
☆ 혹자는 백제의 초기도읍이 위례성(慰禮城)이었고, 온조왕이 다시 옮긴 도읍이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고, 백제의 초기 도읍 위례성(백제 초기왕성의 본래 이름)과 하남위례성(한수의 남쪽에 위치한 위례성이라는 의미로서 지리적 위치를 포함한 이름)은 같은 장소를 말하는 것이다. 이는 삼국사기에 온조왕이 첫 도읍으로 정한 위례성이 북대한수(北帶漢水 : 위례성의 북쪽에 한수가 띠처럼 둘렀다)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온조왕이 기원전 5년에 위례성으로부터 다시 옮긴 도읍은 한산 부아악의 남쪽에 위치한 남한성(南漢城)이었고, 이곳이 곧 광주(廣州)였다.
앞서 어린 비류와 온조가 그 어머니 소서노의 손에 이끌려 졸본(북경 북쪽 하북성 후성진)으로부터 한산 부근의 땅으로 와서 살다가 성장한 기원전 18년에 이르자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한산(漢山 : 지금의 도산 남쪽 오봉산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도읍지를 찾게 된다.
이때 비류는 바닷가에 도읍지를 정하기를 원했으나 신하들은 간하기를 “이 하남(河南 : 한수의 남쪽이라는 의미로서 위례성(慰禮城)은 원래 한수(漢水)의 남쪽에 위치했었다)의 땅은 북대한수(北帶漢水 : 북쪽으로 한수가 띠처럼 둘렀고)하고, 동거고악(東據高岳 : 동쪽으로는 높은 산에 의지하고 있으며) 하였으며, 남망옥택(南望沃澤 :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판이 바라보이며)하고, 서조대해(西阻大海 :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습니다)하였으니 이러한 천연 요새인 지세는 얻기 어려우니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건의 하게 된다.
그러자 비류는 자기의 고집을 꺾지 않고 서쪽 바닷가인 미추홀(彌鄒忽)로 가서 도읍하게 되고, 온조는 신하들이 추천한 곳 즉 한수 남쪽의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게 된다.
☆ 비류와 온조는 원래 쌍둥이 형제였을 가능성이 많다. 왜냐하면 형인 비류가 미추홀에 도읍하기를 원하고 가버렸다고 하여 동생인 온조가 한수의 남쪽 위례성에 도읍하고 또 다른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 이상하기 때문이다. 이는 비류와 온조가 쌍둥이 형제가 아니라면 이해하기 곤란한 일이다. 아마 당시 생존해 있었고 절대적인 결정권을 행사했을 비류와 온조의 어머니인 소서노가 자신이 평생을 바쳐 개척한 땅을 쌍둥이 형제인 비류와 온조에게 공평하게 갈라 나누어주며 각각 나라를 세우도록 승인했던 것이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아직까지 이 위례성과 미추홀을 한반도에서 찾으려 하는 사람들이 많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청도 천안군 직산현 고적조를 보면, “위례성은 성거산에 있다.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1,690척이고, 높이는 8척이다. 성안에 우물이 하나 있다. 지금은 반쯤 무너졌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 기록에 따라 한반도 천안 직산 성거산에서 백제의 초기도읍 위례성을 찾으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사실 백제는 북한산(北漢山)의 남쪽, 한산(漢山)의 동쪽, 한수(漢水)의 남쪽과 서쪽에 위치한 위례성(慰禮城)에 첫 도읍을 정한 후 그 부근을 차지하고 678년 왕조를 유지했는데, 북한산은 지금의 진황도 도산(都山)을 말하는 것이고, 한산은 오봉산(五鳳山), 한수는 도산 남쪽을 흐르는 사하(沙河)를 말하는 것이다.
지금의 진황도 도산 부근은 원래는 마한(마한의 도읍은 지금의 하북성 당산시 풍윤이었다)의 동북쪽 변방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서북쪽으로는 낙랑과 접하고, 북쪽으로는 맥과 접했으며, 동쪽으로는 신라와 접한 곳이었으므로 백제 초기에 낙랑과 맥의 침공을 빈번하게 받을 수밖에 없었던 곳이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초기 기록을 한반도에 비정해 어째 방향이 맞지 않는다고 의아해 했던 분들은 필자의 주장에 따라 삼국사기 기록을 해석해 보면 기가 막히게 딱 맞아 떨어져 삼국사기 기록이 정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북쪽에서 바라본 위례성 주변의 지형]
[북쪽에서 바라본 첫 도읍 위례성과 두 번째 도읍 남한성의 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