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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백제의 한성(漢城)에는 북성과 남성이 있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17. 5. 27. 09:11

윤여동설 - 백제의 한성(漢城)에는 북성과 남성이 있었다 - 최초주장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26(A.D.371) 조를 보면,

  “고구려가 군사를 동원하여 침공하여 왔다. 왕이 이 말을 듣고 패하(패수)가에 군사를 숨겨 놓고 기다리다가 그들이 도착하자 갑자기 치니 고구려 군사가 패배하였다.

  겨울에 왕이 태자와 함께 정예한 군사 3만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공하여 평양성을 공격하니 고구려왕 사유(고국원왕)가 힘을 다하여 항전하다가 화살에 맞아 죽으매 왕이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移都漢山)”

  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중국 사서인 송서와 남사 그리고 양직공도 백제국사에는 백제가 요서 진평현을 차지하고 그곳에 백제군을 설치했다는 기록도 보이는데, 이때 옮긴 도읍이 바로 한성(漢城)이었다.

 

삼국유사 왕력을 보면 백제 13대 근초고왕 조에 신미년(A.D.371)에 도읍을 북한산(北漢山)으로 옮겼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는 한산(漢山)으로 옮겼다고 하고, 삼국유사는 북한산(北漢山)으로 옮겼다고 하였으니 어느 기록이 정확한 것일까?

 

  그런데

  이로부터 25년이 지난 396년에 이르러 고구려 광개토왕이 백제를 침공하여 도읍인 이 한성(漢城)이 함락되고 백제의 아신왕은 광개토왕 앞에 무릎꿇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노객이 되어 따르겠습니다라고 항복을 해야 했고,

  79년이 지난 개로왕 21(A.D.475)에는 고구려 장수왕이 다시 백제를 침공하여 도읍인 이 한성(漢城)이 또 다시 함락되고, 개로왕이 잡혀 죽게 되는데, 이후 이 한성지역은 삼국의 쟁탈지가 되어 쉴 틈이 없었다고 기록할 정도로 전쟁이 심한 지역이 되었다.

 

수서 고구려전을 보면, “도읍은 평양성으로서 장안성이라고도 하는데 동북이 6리이고 산의 굴곡을 따라 쌓았으며 남쪽으로는 패수에 닿았다. 또 국내성과 한성이 있는데 도읍지였던 곳으로서 그 나라에서는 삼경이라 부르고 신라와 매번 서로 침탈하는 전쟁으로 쉴 틈이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북사 고구려전에도, “도읍은 평양성으로서 장안성이라고도 하는데, 동서가 6리로서 산의 굴곡을 따라 성곽을 쌓았고 남쪽으로는 패수에 닿았다........그 외에 다시 국내성과 한성이 있는데 역시 별개의 도읍이다. 그 나라에서는 삼경이라 부른다. 또 요동, 현토 등 수십 성이 있는데, 모두 관리를 두어 통치한다. 신라와는 매번 서로 침탈하는 전쟁으로 쉴 틈이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백제가 도읍인 한성을 고구려에게 빼앗기자 신라가 뛰어들어 그 한성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쟁탈전을 펼쳤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런데 개로왕이 이 도읍인 한성(漢城)을 고구려에게 함락당하고 잡혀 죽을 때의 상황이 삼국사기 개로왕 21(A.D.475) 조에 기록되어 전하고 있다.

  그를 보면, 가을9월 고구려왕 거련(장수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와서 도읍인 한성(漢城)을 포위하므로 왕이 성문을 닫고 나가 싸우지 못하였더니 고구려 사람들이 군사를 네 길로 나누어 양쪽으로 공격하고 또 바람방향을 이용하여 불을 놓아서 성문을 태우매 사람들이 위험을 느끼고 나가 항복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왕은 형세가 곤란하게 되어 어찌할 바를 몰라 기병 수십명을 거느리고 성문 서쪽으로 나가 달아나려 하였더니 고구려 사람들이 쫓아와서 왕을 죽였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고구려의 대로제우, 재증걸루, 고이만년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북성(北城)을 친지 7일 만에 함락시키고, 남성(南城)으로 옮겨와서 치니 성안이 위험에 빠지고 왕은 도망하여 나갔는데, 고구려 장수 걸루 등이 왕을 붙잡아 죄목을 따진 후 아차성(阿且城 : 아단성(阿旦城)이라고도 한다) 밑으로 묶어 보내 죽이게 하였다라고도 기록되어 있어 백제의 도읍 한성(漢城)이 북성(北城)과 남성(南城) 두 개의 성으로 이루어져 있었음을 알게 한다.

 

이때 개로왕은 남성에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는데, 한성의 남성의 위치는 백제의 초기도읍 옛 위례성과 동일한 위치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과연 백제의 도읍 한성(漢城)은 지금의 어디에 위치했었으며, 북성과 남성은 무슨 의미인 것일까?

  백제 근초고왕은 서기 371년에 고구려를 침공하여 평양성전투에서 고구려 고국원왕을 죽이며 승전한 후 도읍을 남한성(南漢城)에서 북쪽방향에 위치한 북한산 남쪽 한성(漢城)으로 옮기게 되는데, 이곳은 백제의 초기도읍지 위례성(慰禮城) 보다 북쪽에 위치한 곳이었다.[아래 그림참조]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신왕 원년조를 보면, “아신왕은 침류왕의 원자이다. 앞서 한성별궁에서 태어났을 때에 신비로운 광채가 밤에 비쳤는데 그가 성장하매 의지와 기풍이 호방하였으며 사냥과 말타기를 좋아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한성의 본궁이외에 별궁이 별도로 존재했음을 알게 한다.

아신왕은 아버지인 침류왕이 죽었을 때 어렸기 때문에 숙부인 진사왕이 왕위에 올랐다가 그 후 진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인물인데, 필자는 아신왕이 태어난 한성별궁은 옛 위례성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위례성과 한성은 남과 북으로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위례성이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고, 한성은 그 북쪽에 위치했다.

  따라서 한성의 북성이란 근초고왕이 옮긴 도읍 한성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되고, 남성은 옛 위례성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장수왕이 백제 한성을 침공했을 때 개로왕은 옛 위례성인 남성에 있었는데 이 남성이 함락될 지경에 이르자 성의 서쪽 문으로 빠져나가 남쪽에 위치한 전 도읍 남한성(南漢城)으로 도망치려고하다가 고구려군에게 잡혀 죽었던 것이고, 왕도 죽고 도읍인 한성(한성의 북성)과 옛 위례성(한성의 남성)을 고구려에게 빼앗긴 백제는 개로왕의 동복동생 문주왕이 왕위에 올라 급히 남쪽의 웅진(熊津)으로 도읍을 옮겨 재기를 모색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