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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환도성(丸都城)이 중국 세력들로부터 계속 침공을 당한 이유 - 최초주장

윤여동 2017. 9. 11. 22:05

윤여동설 - 환도성(丸都城)이 중국 세력들로부터 계속 침공을 당한 이유 - 최초주장

 

 

 

 

 

 

 

 

  삼국사기 고구려전을 보면,

  6대 태조대왕 90(A.D.142) 가을9월 환도(丸都)에 지진이 있었다.

  10대 산상왕 2(A.D.198) 2월 환도성(丸都城)을 쌓았다.

  13(A.D.209) 겨울10월 왕이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겼다[冬十月 王移都於丸都)

  11대 동천왕 20(A.D.246) 가을8월 위나라에서 유주자사 관구검을 보내 1만여명으로서 현토로 나와 침입하였다.........

겨울 10월 관구검이 환도성을 쳐서 함락시켜 주민들을 도륙하고, 곧 장군 왕기를 시켜 왕을 추격하므로 왕이 남옥저로 달아나다가 죽령(필자 주 : 단단대령 또는 절령[자비령]의 오기인 듯)에 이르니 군사들은 분산되어 흩어지고.............이 전쟁 때에 위나라 장수가 숙신 남쪽 경계에 이르러 바위에 공을 새겨 기념하고[刻石紀功) 또한 환도산에 이르러 불내성(不耐城)이라고 새기고 돌아갔다. [괄지지에는, ‘불내성이 곧 국내성이니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이는 곧 환도산과 국내성이 서로 접한 것이다하였고, 양서에는, ‘사마의로 하여금 공손연을 치니 왕(고구려 동천왕)이 장수를 보내 서안평을 습격하였고, 관구검이 와서 침공하였다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북사 고구려전을 보면,

  정시5(A.D.244) 유주자사 관구검이 장수와 1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현토로 나와 위궁(고구려 동천왕)을 토벌하면서 비류에서 크게 싸웠는데, 위궁이 패하여 달아나자 관구검이 추격하여 정현(頳峴)에 이르러 수레를 말이 끌게 하고 환도산에 올라 그 도성(환도성)을 도륙하였다. 위궁(동천왕)은 홀로 장수와 처자만을 데리고 멀리 도망하였다.

  정시6(A.D.245) 관구검이 다시 토벌하니 위궁은 가벼운 차림으로 장수와 여러 가()만 거느리고 옥저로 달아났다.

  관구검은 장군 왕기로 하여금 그를 추격하도록 하여 옥저를 지나 1천여리를 쫓아 숙신의 남쪽에 이르러 바위에 공적을 새기고 또 환도산에도 불내성이라 새기고 돌아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16대 고국원왕 12(A.D.342) 2월에 환도성을 보수하고 또 국내성을 쌓았다.

  가을8월에 왕이 환도성으로 이거(移居)하였다.

  겨울10월 연나라왕 모용황이 용성(龍城)으로 도읍을 옮겼다.

  입위장군 모용한이 모용황에게 청하기를 먼저 고구려를 취한 다음 우문을 멸한 후에야 중원을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모용황이 미천왕의 능을 파서 그의 유골을 싣고, 대궐 창고에 있던 누세의 보물들을 빼앗고, 남녀 5만 명을 포로로 잡고 궁실을 불태우고 환도성을 허물어버리고 돌아갔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북사 고구려전에는,

  “북위 건국4(A.D.342) 모용외의 아들 모용황이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남쪽 좁은 길[필자주 : 남과 북을 바꾸어 잘못 기록한 듯하다]로 쳐들어가 목저성에서 쇠(고구려 고국원왕)의 군사를 대파하고 추격하여 환도에 이르니 쇠는 혼자서 도망하였다.

  모용황은 쇠의 아버지(미천왕) 능을 파헤치고, 그의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진귀한 보화를 노략질하고 남녀 5만 명을 사로잡았으며 그의 궁실을 불태우고 환도성을 허물고 돌아왔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후 환도성(丸都城)의 명칭이 안시성(安市城)으로 바뀐 듯하다.

  이는 645년에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요동성을 함락시키고 평양성을 향하여 진군하였으나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위치한 안시성에 막히게 되어, 당 태종은 별의별 짓을 다해 보았으나 끝내 안시성을 함락 시킬 수가 없어 더 이상 진군을 하지 못하고 철수하고 말았는데, 옛 환도성 위치와 안시성의 위치가 동일하게 나타나고,

  또 삼국유사 왕력 고구려 16대 국원왕(고국원왕) 조를 보면, “임인년(A.D.342) 8월에 안시성으로 도읍을 옮기니 이곳이 환도성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필자의 주장을 확인해 볼 수 있다.

  고구려의 환도성은 곧 안시성으로서, 그 위치가 요동과 가깝게 위치하고 있었고, 고구려가 요동으로 진출하기 위한 전진기지였기 때문에 중국 세력들로부터 끊임없는 견제침공을 당했던 것이라 할 수 있고, 반대로 방어에 있어서도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고구려의 환도성, 안시성은 지금의 북경 북쪽 발해진 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고대의 요동은 지금의 북경 부근을 말하는 것이며, 고대의 요수는 지금의 영정하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 고대 역사해석에서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은,

  고대의 요동이 지금의 북경 부근임을 모르고, 한반도 북쪽 요동반도 부근을 요동이라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고,

  지금의 북경 부근에 실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위치하고 있었는데도, 그 기록을 한반도로 가져와 한반도에 억지로 비정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역사를 해석하려 하기 때문이다.

  한반도에 고조선으로부터 삼한, 삼국, 가야가 위치했었다고 배운 역사는 모두 거짓이었던 것이다.

  아니 조선시대부터는 한반도 역사가 맞고, 그 이전은 대륙역사였는데, 그 역사 모두를 한반도에서 이루어진 역사라고 배웠으니..................

  오호 통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