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발해국 5경의 위치와 서경은 조공길,남경은 신라길,동경은 일본길의 의미 - 최초주장
[중국에서는 지금 내몽골 파림좌기의 고성 터를 거란(요)의 상경임황부 터라고 하고 있으나 사실은 발해국의 상경용천부 홀한성 터이다]
발해국은 고구려 멸망 후 현주(중경현덕부)에 도읍하고 건국하였으나,
문왕(대흠무) 때인 천보(A.D. 742-756) 말년에 중경(중경현덕부)에서 동북쪽으로 300리쯤 떨어진 상경(상경용천부)으로 옮긴다.
발해국의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는 지금의 파림우기(巴林右旗)를 말하는 것이고,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는 파림좌기(巴林左旗)를 말하는 것인데, 지금도 파림좌기에는 아주 큰 옛 고성터가 남아 있다.
지금 중국에서는 파림좌기가 거란(요)의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였다고 하고 있지만, 그것은 거짓말이고 사실은 발해의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 홀한성)였다.
☆ 중국에서는 지금 적봉 남쪽 영성(寧城)의 고성터를 요 중경현덕부 터라고 하고 있고, 요녕성 요양을 동경용원부라고 하고 있으나, 거란족은 원래 산서성 북쪽 지금의 내몽골 상도(商都), 오란찰포(烏蘭察布) 부근을 차지하고 살았던 민족이었지 대흥안령 동쪽에 살던 민족이 아니었다.
옛 혼동강으로 비정되는 지금의 서랍목륜하(시라무렌강) 북쪽 파림좌기, 파림우기 부근은 원래부터 속말말갈족이 살던 곳이었고, 발해국의 문왕은 그 후 정원(A.D.785-804) 중에 또 다시 상경(상경용천부)으로부터 동남쪽 방향에 위치한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로 도읍을 옮겼는데, 곧 책성부(柵城府)라고도 부르던 곳으로서 예(동예)의 땅이었다.
이때 발해국은 신라 가까이에 위치한 동경(동경용원부)으로 도읍을 옮겼다가,
성왕인 대화여 때 다시 상경(상경용천부)으로 되돌아가서 번성하다가 결국 그곳 홀한성(忽汗城)에서 멸망했는데,
발해는 상경, 중경, 동경 외에도 서경과 남경도 있어 5경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신당서 발해전을 보면,
“발해의 국토는 5경 15부 62주이다.
숙신(肅愼)의 옛 땅으로 상경(上京)을 삼으니 용천부(龍泉府)이며, 용주(龍州), 호주(湖州), 발주(渤州)의 3개주를 다스린다.
그 남부를 중경(中京)으로 삼으니 현덕부(顯德府)이며, 노주(盧州), 현주(顯州), 철주(鐵州), 탕주(湯州), 영주(榮州), 흥주(興州)의 6개주를 다스린다.
예. 맥(濊, 貊)의 옛 땅으로 동경(東京)을 삼으니 용원부(龍原府)인데, 책성부(柵城府)라고도 한다. 경주(慶州), 염주(鹽州), 목주(穆州), 하주(賀州)의 4개주를 다스린다.
옥저(沃沮)의 옛 땅으로 남경(南京)을 삼으니 남해부(南海府)이며, 옥주(沃州), 정주(睛州), 초주(椒州)의 3개 주를 다스린다.
고구려(高句麗)의 옛 땅으로 서경(西京)을 삼으니 압록부(鴨淥府)이며, 신주(神州), 환주(桓州), 풍주(豐州), 정주(正州)의 4개주를 다스린다“고 기록되어 있고, 또
“용원(東京龍原府)의 동남쪽 연해는 일본 가는 길이고,
남해(南京南海府)는 신라 가는 길이다.
압록(西京鴨淥府)은 (중국에) 조공 가는 길이고,
장령(長嶺府)은 영주 가는 길이며,
부여(扶餘府)는 거란 가는 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위 그림을 보면서 신당서 발해전의 기록을 읽어보면,
신당서 발해전의 기록이 아주 정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고,
왜 서경압록부를 중국에 조공가는 길이라고 했는지,
왜 남경남해부를 신라로 가는 길이라고 했는지,
왜 동경용원부를 일본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