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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관산성(管山城)은 우수주(牛首州 : 춘주) 부근 - 최초주장

윤여동 2018. 6. 23. 19:39

윤여동설 - 관산성(管山城)은 우수주(牛首州 : 춘주) 부근 - 최초주장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5(A.D.554) 조를 보면,

  “백제왕 명농(성왕)이 가량(加良)과 함께 와서 관산성(管山城)을 쳤다. 군주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이를 맞아 싸우다가 불리하여 신주(新州) 군주 김무력이 병사들을 이끌고 와서 교전하게 되었는데, 그의 비장인 삼년산군 고간도도가 급히 몰아쳐 백제왕을 죽였다.

  이때에야 모든 군사들이 이긴 틈을 타서 싸워 크게 이기고 백제의 좌평 4사람과 사졸 29,600명을 목 베니 말 한필도 돌아가지 못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16(A.D.555) 조를 보면,

  “겨울10월 왕이 북한산(北漢山)을 순행하고 국경을 넓혀서 정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4(A.D.553) 조를 보면, “가을7월 백제의 동북변경을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김무력)으로 군주를 삼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관산성과 신주는 서로 이웃한 곳에 위치했음을 알게 하는데, 역사학자라는 사람들은 이 관산성이 지금의 한반도 충북 옥천 부근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필자로서는 정말 할 말을 잃는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32(A.D.554) 조를 보면,

  “가을7월 왕이 신라를 습격하려고 친히 보,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에 이르렀더니 신라의 복병이 튀어 나오므로 그들과 싸우다가 왕이 난병들에게 살해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신라본기와는 다르게 기록되어 있으나, 이때 백제의 성왕(聖王)이 시해 당해 죽었다는 것은 같다.

  다만 신라본기는 백제의 성왕이 관산성전투 중 신라군에게 잡혀 죽었다고 한 것이고, 백제본기는 구천(狗川)이라는 곳에서 신라의 복병들에게 잡혀 죽었다고 기록하여 그 죽은 위치가 다소 다르지만, 기록대로라면 관산성이나 구천은 서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곳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 위치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구천(狗川)이라는 곳이 백제 초기 기록에도 나타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8(B.C.11) 조를 보면, 가을7월에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甁山)에 목책을 설치했더니 낙랑태수가 사람을 보내 항의했다고 하고 그로 인하여 백제와 낙랑 사이에 화친관계가 끊어졌다고 하는 기록이 있고,

  이어 백제 시조 온조왕 11(B.C.8) 조를 보면, “여름4월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甁山)의 목책을 덮쳐 파괴한 후 1백여 명을 죽이고 납치하여 갔다. 가을7월 독산(禿山)구천(狗川) 두 곳에 목책을 설치하여 낙랑(樂浪)으로부터 오는 길을 차단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같은 왕 18(B.C.1) 조를 보면, “겨울10월 말갈이 습격하여 오므로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칠중하(七重河)에서 맞받아 싸워서 추장 소모를 사로잡아 마한(馬韓)에 보내고 그 나머지 적들은 모두 산채로 묻어 버렸다.

  11월 왕이 낙랑의 우두산성(牛頭山城)을 습격하고자 구곡(臼谷)까지 갔다가 큰 눈을 만나 돌아오고 말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백제가 말갈과 낙랑 사이에 침공 당하고 침공하는 관계가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마수성, 병산책, 독산책, 구천책, 우두산성이 모두 서로 가까운 곳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으니 결국 관산성도 그 부근에 위치했었을 것이다.

  그런데 백제의 마수성(馬首城)이 지금의 하북성 평천(平泉, 필자주 : 철원 풍천원이다)을 말하는 것으로 밝혀졌고, 우두산성(牛頭山城)은 우하량 선사유적지가 있는 능원(凌源, 필자주 : 우수주, 우두주이다)으로 밝혀졌으므로 결국 병산책, 독산책, 구천책도 모두 평천과 능원 사이에 위치했을 것인데, 그 중 구천(狗川)이라는 하천은 지금의 청룡하 최상류로서 평천과 능원 사이 삼십가자진(三十家子鎭)을 지나는 하천으로 비정해 볼 수 있고, 그 부근에는 지금 북궁촌(北宮村)이라는 곳도 있다.

  아마 이곳이 백제의 구원행궁(狗原行宮)이 위치하고 있던 곳으로서 백제에서는 구원행궁을 북궁(北宮)”이라고도 불렀기 때문인지 그 명칭이 동네 이름이 되어 지금까지 전해진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관산성전투가 있던 그 다음 해인 진흥왕 16A.D.555)조를 보면, “겨울10월 왕이 북한산(北漢山 : 지금의 하북성 도산)을 순행하고 국경을 넓혀서 정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백제가 관산성전투에서 신라에게 완벽하게 패한 후 그 남쪽에 위치한 북한산 부근의 땅까지 신라에게 빼앗겼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관산성은 북한산보다 더 북쪽에 위치한 성이었던 것이다.

  즉 관산성은 지금의 평천(마수성)과 능원(우수주)사이에 위치하고 있던 성이었을 것이고, 이곳이 바로 당시 신라와 백제, 고구려의 접경지로서 이곳에서 벌어진 관산성전투 중 백제 성왕이 신라군에게 잡혀 죽었다는 해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결국 관산성은 우수주(춘주) 가까이에 위치한 성이었던 것이고, 서로 뺏고 빼앗기는 각축전을 벌였던 것이다.

  이제야 우리 역사에서 그 위치가 아리송하기만 했던 관산성(管山城)”의 구체적 위치를 비정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 머지않은 때에 그 부근에서 관산성의 확실한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11대 비류왕 22(A.D.325) 조를 보면, “11월 왕이 구원(狗原) 북쪽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손수 사슴을 쏘았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진사왕 8(A.D.392) 조를 보면, “왕이 구원(狗原)에서 사냥을 하면서 열흘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11월에 왕이 구원행궁(狗原行宮)에서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구원(狗原)은 구천(狗川)이 흐르는 벌판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곳은 옛날 온조왕이 구천책(狗川柵)을 설치하면서부터 백제의 강역이 되었고 그 후에는 백제왕들의 사냥터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곳에는 백제왕들이 사냥하면서 머물 수 있는 행궁이 세워져 있었는데, 백제 16대 진사왕이 이 구원행궁에서 죽었다는 것이고, 또 백제 성왕은 그 부근의 관산성을 습격하려다가[일본서기에는 성왕이 전선에서 고생하는 아들인 창(위덕왕)을 위문하기 위하여 가다가 신라 매복군에게 잡혀 목이 잘려 죽었다고 하였다] 구천(狗川)에서 신라의 복병에게 잡혀 죽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