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발해국 장문휴가 침공했던 등주(登州)는 지금의 산동반도가 아니라 쌍성 부근에 위치했던 등주(登州)였다 - 최초주장
구당서 발해말갈전을 보면,
“개원 20년(A.D.732) 무예(발해 무왕)가 그의 장수 장문휴를 보내어 해적을 거느리고 등주(登州)자사 위준을 공격하였다.
현종은 문예를 파견하여 유주(幽州)에 가서 군사를 징발하여 이를 토벌하게 하는 동시에 태복원외경 김사란으로 하여금 신라에 가서 병사를 징발하여 발해국의 남쪽경계를 치게 하였다. 마침 산이 험하고 날씨가 추웠으며, 눈이 한길이나 내려서 병사들이 과반이 얼어 죽어 전공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발해국이 등주(登州)를 침공했고, 당나라에서는 그에 대하여 보복하려 하다가 실패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역사학자라는 사람들은 이때의 “등주(登州)”를 현재의 산동반도로 인식하고는 발해국이 지금의 요동반도에서 발해해협을 건너 산동반도를 침공했다고 역사를 해석한다. ㅉㅉ
그러나 필자는 발해국이 침공한 이때의 등주(登州)는 지금의 산동반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후일의 쌍성총관부였던 영흥(寧興) 부근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필자의 주장을 확인하기 위해 신증동국여지승람 함경도 영흥대도호부 건치연혁을 보자.
“영흥대도호부(永興大都護府)는 본래 고구려의 장령진으로 혹은 당문이라 칭하기도 하였고, 혹은 박평군이라 칭하기도 하였는데, 고려 초기에 화주(和州)가 되었고, 광종 6년에 비로소 성보(城堡)를 쌓았으며, 성종 14년에 화주안변도호부로 고쳤다. 현종 9년에 화주방어사로 강등하여 본영으로 삼았는데, 고종 때에 조휘, 탁청이 병마사를 살해하고 온 고을과 더불어 반역하여 원나라에 귀부하니 원나라에서 이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등주(登州)와 병합하였으나, 그대로 방어사라 일컫다가 뒤에 통주(通州)와 병합하였다.
충렬왕 때에 예전대로 복구하였는데, 공민왕 5년에 군병을 보내어 이를 수복하고 화주목(和州牧)으로 하였고, 18년에 화령부(和寧府)로 승격시켜 부윤(府尹), 소윤, 판관을 두었으며, 이듬해에 토관(土官)을 설치하였다. 본조 태조 2년에 영흥진(永興鎭)이 외할아버지 최씨의 관향이라 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부(영흥대도호부)로 만들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원나라가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화주(和州)와 합한 곳이 바로 등주(登州)라는 곳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발해국이 침공했던 등주(登州)는 산동반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쌍성총관부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던 지명이라는 것을 확인해 볼 수 있고,
☆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공민왕이 환조에게 쌍성의 백성을 진무하게 하였다..........이해 5월에 기씨(奇氏)를 평정하고 밀직부사(密直副使) 유인우(柳仁雨)에게 명하여 쌍성(雙城)을 토벌하게 하였다. 인우(仁雨) 등이 등주(登州)에 머무르니 쌍성과의 거리가 2백여 리(里)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이곡(李穀)의 동유기(東遊記)를 보면,
“二十七日 到登州留二日 今稱 和州
"8월27일 등주에 도착하여 이틀을 머물렀다. 지금은 화주라 부른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등주(登州)라는 곳의 지명이 화주로 바뀌었다고 알려주고 있는데, 동유기(東遊記)는 고려 말 이곡이라는 사람이 1349년 8월 14일에 개경을 출발하여 금강산을 유람하고 회양부를 지나 철령관을 넘고 8월 27에 등주(登州)에 도착했다는 곳으로서 이곳이 곧 화주(和州)라는 것이다.
자 이제는 확실해 진 것이 아닌가?
발해국 장문휴가 침공했던 등주는 산동반도가 아니라 발해국의 남쪽 가까이 위치했던 쌍성 부근의 등주(登州)를 침공했던 것인데, 역사학자라는 사람들이 지명이 같은 곳이 두 곳이 있었음을 구별하지 못하고, 기록 속 등주(登州)를 산동반도라고 인식함으로써 지금까지 발해국의 등주 침공기록을 순 엉터리로 해석했던 것이다.
알았으면 지금부터라도 고치면 된다.
앞으로는 역사적으로 등주(登州)가 두 군데 있었는데, 한 군데는 지금의 산동반도 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후대의 쌍성총관부였던 화주(영흥) 부근에도 등주(登州)라는 곳이 있었는데, 발해국 무왕(대무예) 때에 발해국의 장문휴 장군이 침공했던 등주(登州)는 산동반도가 아니라 바로 후일의 쌍성총관부 부근의 등주를 침공했던 것이라고 고쳐 해석해야 한다는 말이다.
☆ 본 역사천재들의 모임 블로그 글들인 “우리 역사에 대한 윤여동설”을 믿어주면 좋고, 믿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역사연구자분들께서 공개된 윤여동설을 검토하고, 받아들여 우리 역사를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며 해석한다면 아리송하기만 한 우리 역사는 머지않아 그 모든 진실이 밝혀질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