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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해모수의 북부여(北夫餘) 도읍은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赤城縣) - 최초주장

윤여동 2019. 2. 16. 11:05

윤여동설 - 해모수의 북부여(北夫餘) 도읍은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赤城縣) - 최초주장 

 

 

 

[해모수의 북부여 도읍으로 추정되는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 부근의 지형]

 

 

[부여와 북부여의 도읍성으로 추정되는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赤城縣) 시가지 : 동경11549분 북위4054]

 

 

                                                                       [적성고루]

 

  부여(夫餘, 扶餘)는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유서 깊은 나라로서 원래 고조선(왕검조선) 단군왕검의 넷째 아들인 부여에게 봉해진 영지였다.

  부여는 왕검성(현 하북성 승덕시의 열하행궁)의 서쪽방향에 위치했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찾고보니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일대가 그 강역이었고, 도읍은 지금의 적성(赤城)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고조선 말기 어수선한 때 해모수가 그 땅을 차지하고 왕위에 올라 그 후손인 해모수리, 해해사로 왕위가 이어지게 되는데, 기원전 121년에 이르러 해해사왕이 죽고 해우루가 그 왕위를 이어받게 되고, 해우루왕 13년인 기원전 108년에 이르자 동명(東明)이라는 사람이 그 부여의 남쪽 땅을 나누어 차지하고 졸본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우게 되는데, 지금의 하북성 적성현 후성진(后城鎭) 일원이다.

  그리하여 부여는 이때 두 나라로 나누어지게 되어 해우루왕의 부여는 북부여(北夫餘)가 되고, 동명왕이 졸본에 세운 나라는 졸본부여(卒本夫餘)가 된다.

 

기원전 108년은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침공하여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한 혼란스런 해였다.

 

  그랬다가 해우루왕 34년인 기원전 87년에 이르러 해우루왕이 죽고 그 왕위를 동생인 해부루가 이었는데, 그 다음해인 기원전 86년에 이르러 북부여가 군사적으로 강했던 졸본부여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투항하게 되고 그 땅을 졸본부여에게 빼앗기게 되어, 북부여의 해부루는 일부 유민들을 이끌고 동북쪽 예() : 옛 창해군)의 땅으로 옮겨가 그곳에 살던 예족들을 몰아낸 후 그 땅을 차지하고 다시 나라를 세우게 되는데, 이것이 곧 해부루왕의 동부여(東夫餘)이다.

  삼국유사에서 가섭원(迦葉原)이라고 했던 땅으로서 지금의 내몽골 정람기(正藍旗), 다륜(多倫일원인데, 그곳의 섬전하 강물이 둥그렇게 돌아 흐르는 형상이 마치 마하 가섭의 머리모양 같다고 하여 가섭원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삼국유사 동부여 조에, “북부여의 왕인 해부루의 대신 아란불의 꿈에 천제가 내려와서 말하기를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울 것이니 너는 다른 곳으로 피해가도록 하라(이것은 동명왕이 장차 일어날 조짐을 말함이다). 동해가에 가섭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지니 왕도를 세울 만할 것이다하였다. 이에 아란불은 왕(해부루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동부여라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범장의 북부여기 하 을미 23(A.D.86) 조를 보면, “북부여가 성읍을 들어 항복하였는데, 여러 차례 보전하고자 애원하므로 단제(동명왕)가 이를 듣고 해부루를 낮추어 제후로 삼아 차릉(岔陵)으로 옮기게 하고는, 북치고 나팔 부는 사람들을 앞세우고 무리 수만을 거느리고 (북부여의) 도성에 들어와 북부여(필자주 : 졸본부여의 오기로 보인다)라 칭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게 한다.

 

  한편 졸본부여에게 그 땅을 빼앗긴 북부여의 또 다른 일파는 더 북쪽인 숙신의 북쪽 1천여리(실위의 동쪽) 쯤까지 이동하여 그곳에 다시 북부여를 세웠다가 후일 국호가 두막루(豆莫婁)로 바뀐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위서 등에 두막루를 옛 북부여라고 설명해 놓았기 때문에 그렇게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때 대를 이어 살았던 땅을 동부여에게 빼앗긴 예() 또한 소멸하지 않고 단단대령 동쪽으로 옮겨가 임둔군 땅을 차지하고 다시 예국을 세우게 되는데, 이것이 사서들에 진한(辰韓)의 북쪽에 위치한 것으로 나타나는 예(: 동예)로서 지금의 내몽골 고륜기(庫倫旗) 일원이다.

 

☆ 한편 동예(東濊)에게 그 땅을 빼앗긴 임둔군 사람들의 흔적은 오리무중이다. 동화되어 소멸되었는지, 뿔뿔이 흩어져버렸는지 역사에 그 흔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혹시 동예에게 그 땅을 빼앗긴 임둔군 백성들이 그곳을 떠나 베링해를 건너 아메리카로 건너가 인디언, 인디오가 되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임둔(臨屯)이 임뎐, 인뎐, 인디언으로 변화된 것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