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카테고리 없음

윤여동설 - 원(元) 세조 쿠빌라이칸의 능은 과연 어디에 조성했을까? - 최초공개

윤여동 2019. 3. 22. 10:22

윤여동설 - () 세조 쿠빌라이칸의 능은 과연 어디에 조성했을까? - 최초공개 

 

 

 

 

[원 상도성 추정지 : 동경110도29분07초,북위41도57분35초]

 

  쿠빌라이칸은 칭기즈칸이 총애한 아내에게서 출생한 4명의 아들 중 막내인 톨루이의 4번째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30대 중반이던 1251년부터 몽골 제국의 영토 확장과 기반구축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형인 몽케칸은 칭기즈칸의 셋째 아들인 오고타이가 계획했던 송의 정복과 페르시아 정벌을 결심하고, 페르시아 정벌은 쿠빌라이의 또 다른 형인 훌라구에게 맡겼고, 쿠빌라이에게는 중국정벌에 대한 군사·행정의 전권이 주어졌다.

  쿠빌라이는 중국어를 읽거나 쓸 줄은 몰랐지만 중국 사상의 우수함을 일찍 깨닫고 자신의 주변에 믿을 만한 유교학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의 통치술은 주위 한족 학자들의 영향 아래 형성된 것이다. 그는 이 같은 영향 때문에 통치자와 피지배자는 상호의존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도 알았고 타고난 도량과 인자함의 폭을 넓혀나갔다.

  또 자신의 사령(私領)인 경조(京兆 :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에 탁월한 행정체제와 보급기지를 갖추었다. 야전(野戰)에서 그는 휘하의 부장들에게 측근 학자들이 가르쳐 준 교훈, 즉 피정복민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중요하고 또 효과적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것은 칭기즈칸의 방법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고, 중앙아시아로 진격한 쿠빌라이의 동료들과 비교해 볼 때 엄청나게 진보한 문화적인 태도였다.

  사실 중앙아시아로 진출한 몽골족 지도자들은 한 도시를 함락시키면 대규모 학살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쿠빌라이는 운남성[雲南省]의 대리국(大理國)을 먼저 침공하여 송의 측면을 돌파하는 작전을 썼다. 그의 군대는 1253년 가을 운남 지방으로 들어와 겨울에 대리성(大理城)을 정복했다. 1254년 그가 북상하게 되자 부장인 우리양카다이가 이 지역의 위수(衛戍)를 맡게 되었다.

  1257년 몽케의 지휘 아래 남송에 대한 전면작전이 개시되었으나 1259년 몽케가 중도에 죽었다.

  한편 쿠빌라이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한 도시를 포위 공격하던 중, 형제 중 막내이기 때문에 고국의 방비를 맡았던 아리보거가 스스로를 칸으로 옹립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교전 중이던 남송과 휴전을 협정했다.

  12604월 그는 몽골 남동쪽 상도(上都)에 도착했다.

  여기서 그의 지지 세력들은 쿠릴타이(Kuriltai : 大會議)를 열어 55일 몽케의 뒤를 이어 만장일치로 쿠빌라이를 칸으로 선출했다. 10일 후 그는 한문으로 작성된 포고문을 통해 자신이 제위를 계승했음을 선포했다.

  그 당시 장자계승이 후사의 원칙으로 확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막내인 아리보거도 몇몇 강성한 지지 세력의 도움으로 카라코룸에서 쿠릴타이를 열어 자신을 칸으로 선출되게 함으로써 쿠빌라이에게 정면으로 대응하고 나섰다.

  쿠빌라이가 가계 상 적자이고 합법적인 군주라는 마르코 폴로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통성에는 여러 가지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임종 직전의 칭기즈칸이 당시 어린 아이였던 쿠빌라이를 장래의 칸으로 지목했다는 전설이 몽골의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지만 이것은 제위찬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된 것으로 보인다.

  1264년 쿠빌라이는 아리보거와의 전투에서 그를 패배시키고 항복할 것을 강요했다. 아리보거는 2년 뒤에 죽었다. 아리보거와의 전쟁은 한 예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쿠빌라이 가문의 불화는 계속되었다.

  그에게 반기를 든 세력은 쿠빌라이가 스텝 지역의 유목민 생활을 버리고 낯선 중국문화를 수용했다는 사실에 분개하는 사람들이었다.

  반대파의 지도자로 카이두가 추대되자 가문 내의 불화는 더욱 깊어졌다.

  일찍이 칭기즈칸은 친히 오고타이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한 바 있었는데 이 오고타이의 손자인 카이두는 당연히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

  제위는 1250년 쿠데타의 결과로 오고타이 가문에서 톨루이 가문으로 넘어간 것이었다.

  카이두는 쿠빌라이에 대한 적개심을 버리지 않았고 몽골 본국과 투르키스탄의 군주로 이 지역을 통치하다가 1301년에 죽었다.

  카이두와 쿠빌라이의 싸움을 통해 쿠빌라이가 결정적으로 중국세계를 수용하고 유목민의 생활에 등을 돌렸음을 알 수 있다.

  칭기즈칸은 강인하고 무자비하여 언제나 불화하는 경향이 있는 몽골족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이용할 수 있었다.

  쿠빌라이의 업적은 당대(唐代) 이래 분열되어 있던 중국을 통일했다는 것이다.

  이 업적은 그가 야만족·유목민 출신의 정복자라는 점 때문에 더욱 가치 있는 것이다. 중국의 공식 사서(史書)에서 조차도 쿠빌라이는 존대를 받고 있다. 그는 1260년부터 연호를 쓰기 시작했고 남송이 붕괴하기 7년 전인 1271년부터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제정·선포했다.

  그는 몽골 북부에 오고타이가 세운 단명한 수도 카라코룸에서는 거처한 적이 없었고 그 당시 대도(大都)라고 알려진 연경(燕京)에 자신의 수도를 세웠다.

  남송을 완전히 정복하는 데는 몇 년이 더 걸렸다.

  쿠빌라이는 중국의 북부지역만을 다스리고 남부지역은 남송이 명목적으로 관리하는 체제를 유지해나갈 생각이었으나, 그가 남송에 보낸 사절들이 소홀한 대접을 받고 억류당하자 남송을 정벌하기로 결심하고 1267년에 이를 개시했다.

  남송의 황제는 대신들이 잘 보필하지 않아 사태의 진정한 추이를 정확하게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남송의 장수들이 자발적으로 몽골족에 항복하는 형편이었는데도 남송의 대신들은 이를 제대로 황제에게 보고하지 않았던 것이다.

  1276년 쿠빌라이의 부장인 바얀이 남송의 어린 황제를 사로잡았다.

  남송 지역의 남송지지 세력은 1279년까지 항쟁을 계속했으나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중국 전 지역이 몽골족의 손안에 들어오게 되자 중국 남부와 동부에서의 몽골 원정은 실제로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중국의 위신을 회복하려는 목적으로, 아무런 소득도 없는 전쟁을 여러 번 벌였다. 또한 여러 차례에 걸쳐 주변 왕국들에게 턱없이 많은 조공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미얀마, 인도차이나의 안남·참파, 자바, 일본 등이 조공을 바치도록 요구받은 나라들이었다.

  몽골군은 또 원정에서 참패를 당한 적도 있었다. 1274, 12812차례에 걸쳐 일본정벌 선단이 파견되었으나 모두 격파되었다. 선단이 대파된 것은 태풍의 탓도 있었고 일본의 결사항전 탓도 있었다.

  쿠빌라이는 이 같은 식민전쟁의 나쁜 결과나 그 전쟁을 치르기 위해 염출된 비용 따위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식민전쟁은 그의 후계자 대에 가서 종식되었다.

  마르코 폴로는 쿠빌라이가 일본에 금은보화가 많다는 보고 때문에 일본을 합병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벌인 식민전쟁은 주로 정치적인 목적, 즉 중국을 다시 한 번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겠다는 계획 아래 진행된 것이었다.[다음백과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