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세 옥저(沃沮)의 위치에 대한 새로운 가설 - 최초주장
역사서에 나타나는 옥저(沃沮)는 셋이다.
북옥저(北沃沮)가 있었고, 남옥저(南沃沮)가 있었고, 동옥저(東沃沮)가 있었다.
후한서를 보면,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 동쪽은 대해까지이고, 북쪽은 읍루와 부여(동부여), 남쪽은 예(濊), 맥(貊)과 접했다. 그 땅이 방 천리의 절반쯤 된다. 토질은 비옥하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있어 오곡이 잘 자라 밭에 씨를 뿌리면 농사가 잘된다..............
또 북옥저가 있는데, 일명 치구루(置溝婁)라고도 하는데, 남옥저에서 8백여리 떨어져 있다. 그 풍속은 모두 남옥저와 같으며 국경의 북쪽(필자주 : 원문은 국경의 남쪽으로 되어 있는데, 오기가 확실하므로 필자가 고쳤다)으로 읍루와 접했다.
읍루 사람들이 배를 타고 와서 노략질하기를 좋아하므로 북옥저는 그들을 두려워하여 해마다 여름철에는 바위굴 속에 숨어살다가 겨울이 되어 뱃길이 통하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내려와 읍락에서 산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세 옥저가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또 북옥저와 읍루(말갈)가 바로 접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필자는 후한서 동옥저전의 “북옥저가 남쪽으로 읍루와 국경이 접해 있다”는 기록은 오기임에 틀림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같은 책인 후한서 읍루전에는 “읍루는 옛 숙신국이다. 부여의 동북쪽 1천여 리에 있는데, 동쪽은 대해에 닿고, 남쪽은 북옥저에 접했으며, 북쪽은 그 끝을 알 수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삼국지 읍루전에도, “읍루는 부여의 동북쪽 1천여 리에 있다. (동쪽은) 대해에 닿았으며, 남쪽은 북옥저와 접하였는데, 북쪽은 그 끝이 어디인지 알지 못한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며,
또한 실제 북옥저의 동북쪽에 읍루(말갈)가 국경을 접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필자는 “북옥저는 남쪽으로 읍루와 접했다”는 후한서 동옥저전의 기록은 “북옥저는 북쪽으로 읍루와 접했다”라고 기록했어야 옳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추모왕 6년(B.C.32) 조를 보면, “겨울10월 왕이 오이와 부분노로 하여금 태백산(太白山) 동남방에 있는 행인국(荇人國)을 쳐 그 땅을 빼앗아 고을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10년(B.C.28) 조를 보면, “겨울 11월 왕이 부위염으로 하여금 북옥저(北沃沮, 필자주 : 도읍은 내몽골 옹우특기 부근으로 비정된다)를 쳐서 없애고 그 지역을 고을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고구려가 태백산, 개마대산을 넘어 동북쪽으로 점점 강역을 넓혀가는 과정을 알 수 있기 때문이고,
또 남옥저(南沃沮, 필자주 : 도읍은 내몽골 객라심기 부근으로 비정된다)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나 병합 기록은 아직 찾지 못했으나, 남옥저는 기원전 75년에 현토군을 폐지할 때 낙랑동부도위에 속했고, 낙랑동부도위가 서기 30년에 이르러 고구려 대무신왕에 의하여 병합된 상태였기 때문에 구체적인 기록이 남지 않았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남옥저의 위치는 지금의 내몽골 적봉, 객라심기 일원을 말하는 것으로서 대무신왕 19년(A.D.36) 조를 보면, “여름4월 호동이 옥저에 놀러갔더니 낙랑왕 최리가 나와 다니다가 호동을 보고는.........”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고구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이루지 못한 사랑의 비극의 시작이 바로 이 남옥저로 추정되고,
또 태조대왕 4년(A.D.56) 조를 보면, “가을7월 동옥저(東沃沮, 필자주 : 도읍은 내몽골 원보산진으로 비정된다)를 쳐서 그 땅을 빼앗아 성읍으로 만들고 동쪽으로는 바다까지, 남쪽으로는 살수(薩水)까지 국경을 확장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고구려 태조대왕이 추모왕대의 북옥저 병합, 대무신왕대의 남옥저 병합의 뒤를 이어 그 중간에 위치하고 있던 동옥저를 병합함으로써 동쪽으로 대해에 닿았음을 알 수 있고, 이로써 고구려가 세 옥저지역 전체를 차지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46년(A.D.98) 조를 보면, “봄 정월 왕이 동쪽으로 책성(柵城)을 순행하다가 책성 서쪽 계산에 이르러 흰 사슴을 잡았다. 다시 책성으로 돌아와서 여러 신하들과 함께 잔치를 베풀고 술을 마시면서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고, 그들의 공적을 바위에 새겨 놓고 돌아왔다. 겨울10월 왕이 책성으로부터 돌아왔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태조대왕이 예(동예)를 순행했음을 알 수 있어 이미 동예가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신당서 북적 발해전을 보면, “예, 맥의 옛 땅으로 동경을 삼으니 용원부(龍原府)인데, 책성부(柵城府)라고도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책성이 예, 맥의 땅에 위치한 곳이었음을 알게 한다.
그리고 또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20년(A.D.246) 조를 보면, 고구려가 환도성에서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의 침공을 받고 환도성을 함락 당하자 동천왕이 도망쳐 옥저로 향하게 되는데, 이때 동천왕이 도주하는 경로가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이때 동천왕이 왕기에게 쫓겨 죽령을 지나 남옥저까지 도주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사실 환도성에서 옥저로 갈 때 죽령을 넘을 수는 없고, 철령을 넘어야 하므로 삼국사기 기록 속 죽령(竹嶺)은 철령(鐵嶺)의 오기가 확실한 것이고,
또한 북사 고구려전에도, 관구검의 고구려 환도성 침공에 관하여 언급되어 있는데, 기록을 보면, “정시6년(A.D.245) 관구검이 다시 토벌하니 위궁은 장수와 여러 가(加)만 거느리고 옥저로 달아났다.
관구검은 장군 왕기로 하여금 그를 추격하도록 하여 옥저를 지나 1천여 리를 쫓아 숙신의 남쪽에 이르러 바위에 공적을 새기고, 또 환도산(필자주 : 옥저산의 오기가 아닐까?)에도 불내성(不耐城)이라 새기고 돌아왔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왕기가 동천왕을 쫓아 남옥저를 지나서도 1천여 리를 더 추격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기록되어 있으나, 사실 이때 왕기는 철령(鐵嶺)을 넘어 남옥저에 진입한 후 약 3∼4백 여리 정도 더 뒤쫓아 갔을 것이므로 북사의 1천여 리 기록은 환도성에서부터의 전체 추격거리를 말하는 것이라 여겨지고, 이때 동천왕은 태백산 북쪽에 위치한 북옥저 지역까지 도망쳤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지금의 내몽골 극십극등기 남쪽 서랍목륜하 부근으로 판단된다.
그러자 왕기는 동천왕이 도망친 북옥저 지역이 워낙 산세가 험하였으므로 더 이상의 추격을 포기하고 그 도읍으로 비정되는 옹우특기 부근의 바위절벽에 공적을 새겨놓고 돌아갔을 것이다.
[왕기의 마애각석 추정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