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고대의 불함산(不咸山), 태백산(太白山), 도태산(徒太山), 장백산(長白山), 백두산(白頭山)의 진짜 위치 - 최초공개
산해경(山海經) 대황북경(大荒北經)
대황 가운데 산이 있는데 이름은 불함(不咸)이다. 숙신씨의 나라에 있다(大荒之中 有山 名曰不咸 有肅愼氏之國)
산해경(山海經) 해내경(海內經)
동해의 안쪽,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는데 이름은 조선(필자주 : 고조선이다)이다(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 名曰朝鮮).
삼국유사(三國遺事) 고조선[왕검조선] 조
환웅은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꼭대기에 있는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다. 이곳을 신시(神市)라 하고 이분을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 한다.
규원사화 단군기(檀君紀)
여러 고을 땅의 길흉을 판단하여 도읍을 태백산(太白山) 서남쪽(필자주 : 동남쪽의 오기) 우수하벌판(牛首河之原)에 정하고 왕검성(王儉城 : 필자주 : 아사달의 오기이다)이라고 하였다.[필자주 : 아사달은 태백산 동남쪽 우수하벌판에 위치했고, 왕검성은 태백산 남쪽에 위치했다]
후한서(後漢書) 읍루전(挹婁傳)
읍루는 옛 숙신국(肅愼國)이다. 부여의 동북쪽 1천여리에 있는데, 동쪽은 대해에 닿고, 남쪽은 북옥저와 접했으며, 북쪽은 그 끝을 알 수 없다. 땅이 산이 많고 험준하다.
진서(晉書) 숙신씨전(肅愼氏傳)
숙신씨는 일명 읍루(挹婁)라고도 하는데, 불함산(不咸山) 북쪽에 있다. 부여에서 60일쯤(?) 가야하는 거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대해(大海)에 닿았고, 서쪽으로는 구만한국(寇漫汗國)과 접해 있으며, 북쪽 끝은 약수(弱水)에까지 이른다. 그 땅의 경계는 매우 넓어 사방 수 천리에 뻗쳐 있다.
수서(隋書) 말갈전(靺鞨傳)
말갈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다........도태산(徒太山)이라는 산이 있어 풍속에 매우 숭상하고 경외한다. 산 속에는 곰, 큰곰, 표범, 이리 등이 있으나 모두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사람도 이들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
북사(北史) 물길전(勿吉傳)
물길국(물길국)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는데 말갈이라고도 한다.......낙양에서 5천리 떨어져 있다........그 나라의 남쪽에 종태산(從太山, 徒太山의 오기)이 있는데, 중국말로 태황(太皇)이라는 뜻이다. 풍속에 그 산을 매우 경외하여 사람들이 산 속에서 소변이나 대변을 보지 않고, 그 산을 지나가는 사람은 오물을 단아가지고 간다. 산 속에는 곰, 큰곰, 표범 이리가 있으나 모두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사람들 역시 그들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
통전(通典) 읍루전(挹婁傳)
곧 옛 숙신씨의 나라이다........그 나라는 불함산(不咸山)의 북쪽에 있다. 부여 동북 천여리 대해가에 있다. 남으로 북옥저와 접했고 북쪽은 그 끝을 알지 못한다. 넓이가 수천리이다.
구당서(舊唐書) 말갈전(靺鞨傳)
말갈은 대개 숙신의 땅으로서 후위 때의 소위 물길(勿吉)이다. 경사(장안)에서 동북으로 6천여 리에 있다. 동쪽은 바다에 이르고, 서쪽은 돌궐과 접했으며, 남쪽은 고구려와 경계하고, 북쪽은 실위와 인접해 있다.
신당서(新唐書) 발해전(渤海傳)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서 고구려에 부용되어 있었으며, 성은 대씨이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무리를 이끌고 읍루의 동모산(東牟山)을 차지하였다. 그 땅이 영주(營州) 동쪽 2천리에 있으며, 남쪽은 신라와 닿아 니하를 국경으로 삼고, 동쪽은 바다에 닿았고, 서쪽은 거란까지이다.
성곽을 쌓고 사니 고구려의 패잔병들이 점점 모여 들었다. 만세통천(A.D.696) 중에 거란의 이진충이 영주도독 조홰(조문홰)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사리 걸걸중상이라는 자가 말갈 추장 걸사비우 및 고구려의 남은 무리와 함께 동쪽으로 달아나 요수(遼水)를 건너 태백산(太白山) 동북쪽을 거점으로 하여 오루하와의 사이에 성벽을 쌓아 수비하였다.
불함산(不咸山), 도태산(徒太山), 장백산(長白山), 백두산(白頭山)은 환인, 환웅, 단군들이 천부인 세 개를 전해 받았다는 우리 한민족의 성산인 태백산(太白山)의 다른 이름들이다.
우리 한민족은 대개 태백산, 백두산으로 불렀고, 숙신, 말갈, 여진족들은 도태산, 장백산 등으로 불렀는데, 찾고 보니 그 산은 지금 중국 하북성과 내몽골의 경계에 위치한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 2,067m)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앞선 사서들에 전혀 나타나지 않다가 명(明)나라 초에 편찬된 원사(元史)에서부터 장백산(長白山)의 높이가 2백리이고, 산꼭대기에 둘레가 80리에 이르고, 깊어서 그 깊이를 잴 수 없는 못이 있다고 기록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