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고조선 때의 개마국(蓋馬國) 남쪽이 후세에 북옥저(北沃沮)가 되었다 - 최초주장
[산악지형인 대광정자산(옛 태백산, 장백산) 북쪽 북옥저 추정지 ; 북옥저는 말갈족의 노략질을 피해 여름철에는 산악지역으로 피해 석굴속에서 살다가 겨울철이 되어야 내려와 읍락에서 살았다고 한다]
규원사화를 보면,
“단군의 교화가 사방에 두루 미치게 되어 북쪽으로는 대황(大荒)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알유(猰貐)를 거느리고, 남쪽으로는 해대(海岱)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창해(蒼海, 필자주 : 대해의 오기이다)에 닿았다.........
천하를 나누어 공적에 따라 땅을 나누어 봉했다.
치우씨의 후손에게는 남서쪽의 땅을 주었는데, 들이 넓고 바다와 하늘이 푸르러 남국(藍國)이라 하고, 치소는 댁엄려홀(宅奄慮忽 : 북경 부근으로 비정된다)에 두었고,
신지씨의 후손에게는 북동쪽의 땅을 주니 산하가 웅장하고 풍기가 굳세어 루진국(僂侲國) 또는 숙신(肅愼)이라 하고 방언으로는 호장(豪莊)이라고도 하였는데, 치소는 숙신홀(肅愼忽 : 내몽골 파림좌기 부근으로 비정된다)에 두었다.
고시씨의 후손에게는 동남쪽의 땅을 봉하였는데, 산하가 아름답고 초목이 무성하여 청구국(靑丘國)이라 하고 치소를 낙랑홀(樂浪忽 : 요녕성 조양부근으로 비정된다)로 정하고,
주인씨의 후손에게는 개마국(蓋馬國)을 주고, (필자주 : 치소는 지금의 내몽골 극십극등기로 비정된다)
여수기는 예(濊)의 임금을 삼았다. (필자주 : 치소는 지금의 내몽골 정람기 부근으로 비정된다)
부소, 부우와 막내 부여에게는 모두 서쪽 땅을 주었다(필자주 : 부여의 치소는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으로 비정된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치우씨에게 남국(藍國)을 주고 선조의 뜻을 이어 백성을 어루만지게 하여 생업을 즐기게 하고 전쟁에 대비하여 훈련을 하니 언제나 서남쪽의 방패가 되었다. 또 백성들이 자주 해대 땅으로 옮겨가니 후세에 항상 중국의 여러 나라와 승부를 겨루게 되었다.
신지씨에게 준 숙신(오진국)은 몹시 추워 오곡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땅은 매우 넓은데 사람은 적어 목축을 하게하고 백성들은 활을 메고 칼을 차고 사냥을 하였다. 후세에 백성들이 점점 흑수 땅으로 옮겨가서 마침내 수렵과 사냥으로 생활하게 되니 매우 건강하고 용감하여 험난을 몰라 멀리 여러 나라에 진출했으나 글공부는 하지 않았다. 후세에 이들을 한(漢)나라는 읍루(挹婁)라 하였고, 원위는 물길(勿吉)이라 했으며, 수당은 말갈(靺鞨)이라 하였는데 북쪽의 야만인과 서로 섞여 점점 제 풍속을 잃어서 오랑캐라는 업신여김을 면치 못하였다. 후에 일어난 금(金)이나 여진(女眞)이 모두 그 후손이다........
고시씨는 청구국에 나가 산천과 토지를 밭과 들로 개간하여 농업을 일으켰다. 기후가 온화하고 오곡이 풍성하여 백성들이 모두 가볍고 따뜻한 옷을 입고 살았으며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관대와 의복을 입고 신발을 신는 법도가 제법 갖추어지니 천하에 문무가 아울러 일어났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후한서 동옥저전을 보면,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 동쪽은 대해까지이고, 북쪽은 읍루와 부여, 남쪽은 예, 맥과 접했다............
또 북옥저(北沃沮)가 있는데 일명 치구루(置溝婁)라고도 하는데, 남옥저(南沃沮)에서 8백여리 떨어져 있다. 그 풍속은 모두 남옥저와 같으며, 국경의 북쪽으로 읍루와 접했다. 읍루 사람들이 배를 타고 와서 노략질하기를 좋아하므로, 북옥저는 그들을 두려워하여 해마다 여름철에는 바위굴 속에 숨어 살다가 겨울이 되어 뱃길이 통하지 않을 때가 되어야 내려와 읍락에서 산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후한서에서 말하는 북옥저는 위치상 규원사화에서 단군 왕검이 주인씨의 후손에게 봉해 주었다는 개마국(蓋馬國) 남쪽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다.
☆ 옛 태백산은 지금의 북경 동북쪽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규원사화에서 말하는 개마국은 태백산 북쪽 산악지역으로서 지금의 내몽골 극십극등기 일원으로 비정되는데, 개마국의 위치를 정확히 찾으면 우리 역사에서 아직 밝히지 못하고 있는 우리 상고사와 고대사의 역사 강역을 찾을 수 있게 되고, 세 옥저의 국호는 태백산의 북쪽에 위치한다하여 북옥저, 태백산의 동쪽에 위치한다 하여 동옥저, 태백산의 남쪽에 위치한다하여 남옥저라 불렀던 듯 하다.
북옥저의 도읍은 내몽골 옹우특기(翁牛特旗)부근,
동옥저의 도읍은 적봉 북쪽 교두진(橋頭鎭)부근,
남옥저의 도읍은 적봉 남쪽 객라심기(喀喇沁旗)부근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중국 사서들을 보면,
고구려가 건국초기 동북쪽으로 강역을 넓혀가는 과정을 알 수 있다.
B.C.32년 태백산 동남방 행인국(荇人國) 병합
B.C.28년 북옥저(北沃沮) 병합
A.D.26년 개마국(蓋馬國) 병합
구다국(句茶國) 투항
A.D.30년 낙랑동부도위 축출
A.D.37년 전한낙랑군 축출
A.D.44년 후한광무제의 낙랑침공으로 살수이남 상실.
후한에서 낙랑군(후한낙랑군) 재설치
A.D.56년 동옥저 병합(필자주 : 이때 고구려가 동쪽으로 바다까지, 남쪽으로 살수까지 강역을 넓혔다고 하였는데, 동쪽의 바다는 옛날에는 바다(대해)였던 지금의 동북평원을 말하는 것이고, 남쪽의 살수는 북경 동북쪽 고북구 부근의 조하를 말하는 것임)
A.D.72년 조나(藻那) 병합(동옥저와 동예 사이에 위치한 것으로 비정됨. 지금의 노합하 하류 부근에 위치했었을 것임)
A.D.74년 주나(朱那) 병합(동옥저와 동예 사이에 위치한 것으로 비정됨. 지금의 노합하 하류 부근에 위치했었을 것임)
A.D.98년 태조대왕의 책성(柵城) 순행 등으로 나타나는데,
신당서 발해전을 보면, “예, 맥의 옛 땅으로 동경을 삼으니 용원부인데, 책성부라고도 한다” “옥저의 옛 땅으로 남경을 삼으니 남해부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예맥 지역에 위치했던 책성이 후일 발해의 동경용원부가 되었음을 알 수 있고, 또 옥저가 후일 발해의 남경남해부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후한서 동옥저전을 보면, 동옥저가 개마대산의 동쪽에 위치했고, 북옥저가 산악지역 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옥저에 동옥저와 남옥저, 북옥저가 있었으며, 남옥저의 도읍에서 북옥저의 도읍까지 800여리 떨어져 있음도 알 수 있다.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고대의 불함산, 태백산, 도태산과 여진의 장백산, 고려의 백두산은 지금의 칠로도산산맥 최고봉인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으로 밝혀졌고,
북옥저의 도읍은 지금의 내몽골 적봉시 옹우특기(翁牛特旗) 부근,
동옥저의 도읍은 지금의 내몽골 적봉시 교두진(橋頭鎭) 부근,
남옥저의 도읍은 지금의 내몽골 적봉시 객라심기(喀喇沁旗) 부근으로 비정된다.
따라서 옛 사람들은 지금의 내몽골 객라심기에서부터 서북쪽으로 서랍목륜하 상류까지를 800여리라 기록했던 것이라 여겨지고, 대광정자산의 북쪽인 지금의 서랍목륜하의 남쪽 백차하(百岔河) 부근으로부터 옹우특기(翁牛特旗)까지의 산악지역이 북옥저, 대광정자산의 동남쪽인 객라심기 부근이 남옥저, 대광정자산의 동쪽인 교두진 부근이 동옥저였음이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